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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튼튼한 토마토 Dec 14. 2020

처음 사본 비싼 쌀

스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밥벌이를 하면서도 내가 어른이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인턴으로 입사해서 일할 때에도 특별히 내가 어른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보다 버는 돈은 많았지만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 쓸 일이 늘어만 갔다. 내가 상상하던 어른은 단순히 밥벌이를 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 하루가 어른의 삶이라면 내일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이면 정규직으로 전환을 못 시켜준다고 으름장을 놓던 부장의 횡포를 꾸역꾸역 버티며 정규직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렵게 취직을 했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을 때 기쁘지는 않았다. 조금 익숙해진 이 끔찍한 생활이 연장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정규직이 된 기념으로 은행에 가서 주택 청약 통장을 만들었다. 정규직이 되어 월급이 올랐으니 저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먼 미래에 집을 살 때 주택 청약 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래의 내가 집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청약 통장을 손에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스스로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다. 파란색 은행 로고가 그려져 있는 통장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으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자각을 했다 하더라도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선명히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몇몇의 사건들을 통해 나는 완연한 어른이 되었다.


평소에 먹던 쌀 보다 만원이나 더 비싼 쌀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할인을 하지 않았다면 이만 원 정도 더 비싸 절대로 사지 않을 쌀이었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 쌀은 늘 인터넷 최저가를 찾아 샀다. 쌀이야 다 비슷하지. 더 좋은걸 살 필요는 없지 않겠나 싶었다. 최저가를 구매하는 건 쌀뿐만이 아니었다. 달걀, 세제, 화장지 다 최저가를 찾아 구매했다. 몇 천 원 더 비싼 것들을 선뜻 구매하기에는 내 마음이 넉넉하지 않았다. 천 원, 이천 원 더 비싼 제품을 산다고 더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보다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최저가를 찾아 장을 봤다. 좋은 제품을 꼼꼼히 살피고 저렴하게 구매하면 좋겠지만 나의 문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저가 제품을 산다는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만원이나 더 비싼 쌀을 샀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쌀은 엄청 맛있었다. 매번 밥을 할 때마다 고소한 밥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다. 만원으로 한 달의 행복을 산 기분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실 예전에도 만 원 더 비싼 쌀을 살 수 있었다. 이천 원 더 비싼 화장지도 살 수 있었고 천 원 더 비싼 계란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침밥으로 젤리를 먹고 야식으로 치킨을 먹으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 인가. 사실 젤리 사 먹는 돈을 아꼈으면 좋은 쌀을 먹을 수 있었다. 인스턴트 음식과 야식을 가급적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철 과일을 그때그때 조금씩 사서 챙겨 먹는다. 놀랍게도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지금 이 생활이 예전보다 식비가 적게 나온다. 외식을 하지 않고 버리는 식재료 없이 알뜰하게 다 먹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싼 쌀을 샀다고 내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몸을 챙기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보다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넉넉해진 마음이 날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다. 스스로를 아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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