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맥주캔 라면끓이는 법
영화처럼 말도 탔겠다, 쌍무지개도 떴겠다, 테렐지의 밤은 길겠다!
이제 거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 같은 마음으로 만찬을 주문했다.
양 한 마리를 통째로 감자와 함께 통(회사 구내식당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대량 물통)에 넣어 몇 시간 푹 삶아 낸 ‘허르 헉’은 담백했다. 술이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가며 분위기는 무르익는데 도무지 밀려오는 잠을 떨칠 수가 없어 홀로 게르로 돌아왔다.
게르에는 동그란 천막을 따라 1인 침대가 기둥 사이마다 하나씩 놓여있다. 바닥 중앙에 난로를 설치해서 찬 기운을 장작을 타닥타닥 태워 몰아낸다.
긴 시간 낡은 차를 타고 테렐지로 오는 길에 묻어온 노곤함과 말을 타느라 온 몸에 힘을 준 탓에 침대에 몸을 누이자마자 땅으로 몸이 가라앉았다. 몇 분 흘렀을까? 낯선 남녀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뭐지?'
몸은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데 호기심은 발랄하게 튀어 오르고 있다.
갑자기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다. (우네.. 울어.. 술 취했네.. 술 취했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남자가 여자를 달래고 있다. (뭘 잘못했구먼)
물기를 거둔 여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차오른다.( 왜? 왜? 다그치고 있다. 술이 여자를 집어삼켰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자의 울분을 달래고 어르느라 모기의 날갯짓처럼 앵앵거리는 중에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다. (따뜻한 남자구먼, 근데 한 눈을 팔았단 말이야?)
헉! 몽골어 동시통역이 되는 거야, 지금?
그랬다.
사람이 살고
사랑이 살고
사랑 때문에 눈물이 살고
눈물 때문에 술이 살고
꼬장이 살고
남을 잠 못 들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몽골에도 살고 있었다.
대충 분위기는 알겠고, 잠들어보겠노라 노래(왜 하필 나는 김광석의 음악파일을 잔뜩 담아갔던 걸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나도 알고 너도 아는구나) 볼륨을 아무리 크게 올려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몽골 여인의 구구절절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은 통하지 않아도 다 안다 다 알아..
사랑이 널 술 취하게 하고
사랑이 널 울게 하고
사랑이 널 잠 못 들게 하는구나
현지의 생생한 사랑이야기에 몽골의 밤이 뼈에 사무치고 있다.
그래도 엄연히 아침은 오고 배는 고프다.
마지막 일정이라 현지 가이드도 늦잠을 잔다.
여행자들의 비상식 컵라면도 동났고 봉지라면 몇 개만 남아있다.
냄비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우리의 조리도구는 맥주캔.
대한민국에서 군 복무를 마친 예비역 아저씨들의 창의성은 몽골 하늘을 찌른다.
게르에서 캔 라면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1. 맥주캔을 딴다
2. 맥주를 홀짝 다 마신다
3. 맥가이버 칼로 캔 뚜껑을 사정없이 오려낸다
4. 생수를 붓는다
5. 뜨겁게 타오르는 난로 위에 생수든 캔을 올려두고 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까지 기다린다. 아까 한꺼번에 입에 넣었던 맥주의 취기가 오른다.
6. 물이 끓으면 봉지라면을 잘게 부숴 맥주캔 속으로 곱게 차곡차곡 쌓듯 넣는다. 그 위에 수프를 보기 좋게 뿌리고 다시 끓을 때까지 기다리다
7. 다 익었다 싶으면 목장갑 낀 손으로 라면 캔을 들고 (캔이 무지하게 뜨거움) 다른 손으로 젓가락을 쥐어 톡톡 집어 먹는다.
캔 라면을 먹고 난 뒤 테렐지 언덕에 오른다.
그림같이 펼쳐진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모닝 맥주에 취하니 세상 부러울 것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