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하는 중년 남자 Jul 02. 2024

내 인생의 영화 21

햇빛 쏟아지던 날들

우리 영화 중에 <말죽거리 잔혹사>를 좋아한다. 그 영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독법이 가능할 것이나,

그런 저런 의미를 다 젖혀두고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다.

비록 그 시절이 폭력과 억압, 야만과 비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고 해도

꿈많던 사춘기 시절은 평생 가장 인상적으로 추억되는 법, 그것은 기억 속에서 늘상 낭만적으로 채색된다.

순수와 열정, 좌절과 답답함이 뒤범벅되어 스무살을 향하던 시절,

누구나 그 시절을 지나오지 않았던가.


중국영화 중에도 그런 영화들이 있다.

보고 나서는 지난 그 시절이 아련해지는 그런 영화 말이다.

1994년작 <햇빛 쏟아지던 날들>도 바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중국의 국민배우 중 한명인 강문의 감독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 늘 터프하고 투박하게 나오는 그 강문이 만든 거라고는 좀체 믿어지지 않을만큼,

소년의 성장과정을 아주 섬세하고 또 촘촘하게 담아낸 영화다.

한편으로는 문화혁명의 상처를 에둘러 표현한 영화기도 하고.


주인공을 맡아 열연한, 소년배우 시아위는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고,

당시로서는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그만큼 자연스럽고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94년도작이지만 한국에선 98년도에 개봉되었다. 

나는 대학후배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강남의 동아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당시 홍보도 별로 안됐고 상영관도 별로 없었으며

극장안 관객도 드문드문했지만, 무척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여름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태양은 우리를 따라 다녔고, 뙤약볕은 너무 뜨거워 현기증의 날 지경이었다. 나의 찬란했던 열 여섯 시절처럼"


영화는 마샤오쥔 이라는 16세 소년의 성장과정을 담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겪게되는 성장통을,

뜨거운 여름을 통과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영화는 문화대혁명을 그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역시나 정면으로 들이대지는 못하고 그것을 우회적으로 비춘다.

어른들이 시골로 하방되어 텅빈 북경의 공간은

샤오쥔과 같은 어린 아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는 놀이터였다.

군인인 아버지는 거의 집을 비울만큼 바쁘고

전직 교사였던 어머니는 노동자로 전락, 그 분노를 터뜨리기 일쑤다.


샤오쥔은 시대의 광기와도 단절되어 있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스스로 성장해 간다.

세상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것, 그것은 결국 혼자서 터특해가는 것 아니겠는가.


소년의 여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즉 이성에 눈을 떠 가는 것,

우연히 마주친 연상의 소녀에게 미혹되어 그녀를 허둥지둥 따라다닌다.

다른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끊임없이 남자다움을 확인하려 한다.

그것은 거친 패싸움, 술, 담배, 위험한 행동을 하며 얻는 쾌감 등등으로 나타난다.

첫사랑 소녀에게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올라가던 굴뚝 높이의 다이빙대에서

과감히 뛰어내리는 것으로 소년은 그의 여름을 서서히 마감한다.


재밌는 것은,

열 여섯 그들의 여름은 아름답고 생생한 색채로 그려지는 것에 비해

훗날 어른이 된 그들을 비출때는 흑백으로 처리된다는 점이다. 



열여섯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그를 성장시키던 그때 그 모든 것들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 일 것이다.

이전 19화 내 인생의 영화 2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