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찰랑찰랑
요즘 교회에서 모임을 하면 거의 매주 아무것도 아닌 일로(때로는 큰일도 있고) 눈물을 보인다.
같이 모임을 하는 분들이 이제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냥 웃으며 눈이 또 촉촉해지셨다며 어색함을 무마해주시려고 한다.
왜 이리 주책바가지처럼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는 것일까.
혼자 있을 때도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누구와 통화하닥 갑자기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
왜 그러냐면…(벌써 갱년기?)
이유를 대려면 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여기에 풀어놓을 수는 없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부분인 것도 있고 또는 여느 이유처럼 일반적이라 이야기할만한 것도 있지만
무엇 한 가지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나도 그것이다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어서 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그만의 속사정이 있다.
누군가의 표정이 기쁨으로 빛나기도 하고
슬픔으로 찰랑 거릴 때도 있고
분노가 쌓여 타오르기도 한다.
어떤 주된 마음이 한 사람 안에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얼굴빛이 그 마음의 내용을 말해주기도 한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차올랐다가 다 쏟아져버려 텅비인 얼굴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기쁨을 좋아하지만 인생에는 기쁨만이 있지 않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다.
눈물이 가득 차있어 슬픔이 찰랑거려도 순간순간 소중하고 귀한 순간들이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주된 마음에 쉽게 희석이 돼버린다.
기쁨이 가득 차 있어 힘들고 슬픈 것이 가끔 나타나 그것들이 기쁨에 희석이 되면 좋을 텐데
인생의 시절 중 철이 들기 전에는 기쁨이 바탕색 같고 슬픔이 가끔 있는 물감 같지만
나이가 40이 넘어가면 그것이 여러 가지 슬픔 분노 회한 같은 물감이 가득 칠해져 바탕색이 잘 안 보인다.
예전에 미술수업을 들었는데 유화를 그릴 때 여러 단계를 겹쳐 올리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배웠다.
그런데 좋은 그림이 되려면 초벌을 했을 때의 붓터치가 쌓이고 겹쳐진 레이어 사이로 아주 조금씩 비치는 부분이 있는 게 좋다고 이야기하셨다.
인생이 40년을 살게 되면 아주 다양한 경험의 색이 겹쳐졌을 것이다.
나에게 인생에 처음 붓질을 하던 초심 같은 마음이 내 마음속 어디엔가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초벌로 그리려 했던 삶의 생각들은 지금 남아있는 게 있을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아내는 게 버거워서 그냥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만 파편처럼 가끔씩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 40년을 살다 보니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를 많은 것들이 내 안에 가득 차있어서 찰랑거린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전체적인 감정은 슬픔에 가까운 것 같다.
모든 색을 다 섞어버리면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 된다.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을 내 안에서 휘휘 저으니 슬픔이 나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싫다거나 부정하거나 아니라고 외면할 수는 없다.
살아보니 슬픔은 100% 완전한 슬픔이 없거든
완벽한 기쁨의 결정체를 지향하면서 사는 어리석은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가장 힘들었을 때 기쁨을 경험했던 적이 많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오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안다면 슬픔을 마냥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
찰랑거릴정도로 차있는 슬픔도 어떤 경험을 만나 그 색이 변하게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콸콸 쏟아 엎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비워진 뒤에 또 다른 색으로 칠하게 될 것이다.
아주 무겁고 쳐진 몸을 또 일으켜 하루를 살고 우울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다가 밤에 잠자리에서
아이의 온기를 느끼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꼭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면 일단 그 순간은 모든 것이 휘발된다.
그리고 무거워서 저 지하로 떨어졌던 눈금이 0으로 맞추어진다.
나에겐 그런 순간이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다.
매일의 시작점을 0으로만 놓을 수 있어도 나쁘지 않다.
언젠가는 0 위로 눈금이 올라갈 때도 있겠지 하면서
누구에게나 방전이 된 자기를 채울 수 있는 모먼트들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