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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Jun 28. 2018

구남친에게서 온 '자니?'라는 문자

나 : 안 잔다 이 XXX야



구남친은 항상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항상 내 주위에 있는 듯 싶지만 참 멀기도 한 존재. 밤만 되면 명확히 보이고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존재.


밤의 경계와 함께 다가오는 달


제발 자니? 잘 지내? 같은 안부 인사는 나 대신 부모님께나 자주 전했으면, 싶다가도 답장을 해야 할지 말지 이내 바닥 없는 고민에 빠져버린다. 내겐 마냥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 그래도 미워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존재다.


잘 아는데도 왜 그랬을까. 어차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아무리 주위에서 '왜 제 손으로 시궁창을 파냐'며 갖은 욕을 해도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마련이다.


얼마 전까지 나는 과도기에 빠져있었다. 나는 바닥이 어딘지 짚어봐야 '아 이것이 바닥이군!'이라고 깨닫는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글쎄 말이야 쉽지. 오랜만에 서로의 바닥을 봐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과의 인연을 끊기란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징글맞던 익숙함이, 무언가 우리만 공유하는 듯한 비밀들이 나를 계속 끌어당겼다. '역시, 이 사람만이 날 이해할 수 있어' 같은 무한 합리화 속에 난 이미 여러 번 내 자신을 내던졌다.


하지만 자존감의 늪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나의 구남친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그저 비겁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비겁한 사람과의 인연은 항상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



사람의 기억이란 건 거짓말 투성이다.

자동 포토샵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쁜 기억들은 다 잊히고 좋은 추억들만 남는다. 그렇게 행복으로 보정된 찰나의 순간들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답장을 한건, 내가 연락을 한건. 그가 내 구남친이, 내가 그의 구여친으로 나타나길 마음먹은 건.


미화된 추억에 들어맞게 그 사람을 재단하려던 그 대가는 참 컸다. 그와 오랜만에 마주하고 보니 과거의 그만큼 현재의 그도 참 비겁한 건 매한가지였다. 자신이 관여된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려고 하는 적이 없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던 어른들의 말이, 정말 잔인하게도 그 사람의 경우엔 옳았다.


똑같은 발단, 똑같은 과정, 똑같은 말과 똑같은 상처로 다시금 데자뷔를 겪은 뒤 내가 정한 규칙은 하나였다. 그에게 연락이 오거나, 연락이 하고 싶어 질 때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것.



오늘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처 안 받을 자신 있어?

사랑, 잠깐의 설렘, 혹은 그리움이든 뭐든 간에, 내게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았는지. 내 자신에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답이 '아니오' 면 절대 연락을 하거나 받지 않았다.

사실 이 방법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이미 거듭된 상처로 쫄보가 되어버린 내게 최대한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였을 뿐. 그리고 이 방법 덕분에 조금이나마 그의 반경 내에서 사라질 수 있었으니 그 결과만으로 만족한다.


이불 킥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음, 정말 이건 이제 와서야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나는 그와 연락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그와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항상 그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비록 상처는 받았을지라도 현재의, 진짜의 그를 마주했다.

여전히 소중한 존재라는 허울 좋은 말, 그 선을 넘고 서로가 쓰던 가면을 벗겼기에 이제는 안다. 옛날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무엇도 아닌 내 머릿속의 기억일 뿐이라는 걸. 그 사람은 이미 떠났고, 이제 내가 떠나야 할 타이밍이란걸. 그것 빼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포기하면 쉽다. 포기하는 게 어렵지만.

나는 소위 '쿨하지 못한 사람'이다. 옛날도 지금도, 어쩌면 다가올 미래에도 구남친이란 존재엔 당혹감과 찝찝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밤을 지새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징글맞은 과도기를 겨우 끝낸 지금,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한다. 구남친과의 연락 문제는 이기고 지고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과거에 붙잡 내 자신을 이겨내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아주 조금, 아주 잠깐의 승리감에 취해 있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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