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너무 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건넛마을에 다녀와야 하는데
심부름을 마쳐야 다시 돌아갈 수 있는데
검은 비보다 더 검은 윤곽이
어른거리다 사라져서
분명 지금까지 샛길을 몰래 걸어왔는데
검은 빗물이 발자국을 메워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데
물기 어린 바닥에 고꾸라진 얼굴은 왜
여기를 보고 있을까요
그을린 듯 얼룩진 얼굴은 꺾인 목에 붙어있을
뿐인데 나는 왜 이 비 속에 있는 걸까요
그저 길을 잃어서 잠시
멈춰있을 뿐이었는데
바닥에 쓸린 생채기가 화끈거리는 얼굴이
빗물에 섞여 떨어져서 도통 보이지 않는
마을 쪽으로 그렇게 목을 길게 빼서는
검은 물이 가득 차오른 언덕에서
나는 대체 언제쯤 내려갈 수 있는 걸까요
할머니가 기다릴 텐데
집으로 가서 기다려야 하는데
검은 비가 그치질 않아요
할머니, 할머니는
어디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