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있는 공간

도심 혼캉스

by 하이민

욕조


구겨진 몸이 물결을 따라 출렁이다

뜨겁게 익어버린 향기에 놀라 미끄러졌다

어느새 흐물거리는 마음 한 조각이 피부를 타고 흐르고

멍하니 바라본 바닥은 하얗게 일어난 공기방울에 가려져 유유히 가라앉고 있었다


네모나게 늘어진 상자 안에서

안개를 만지고 꽃 한 송이를 들이켜다 밀려오는 구름바다에 파묻 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붙잡고 싶어

거센 열기가 아쉬운 온기가 될 때까지

팔다리를 휘적대며 기꺼 파도에 몸을 맡겼다




몇 년 전만 해도 일 년에 두세 번은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가곤 했다. 그때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이리저리 치이며 받게 된 월급을 나를 위해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주변 모두가 가니 나도 가야지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새삼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여행 다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지까지 오고 가는 과정을 온전히 즐긴다기보단 여행이라는 일을 해치운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특히 차를 타고 가는 일정이면 더욱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멀미가 유독 심했다.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어서 자동차나 버스 등 바퀴를 달고 지면을 디디는 교통수단을 타는 순간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곤 한다. 몇 시간을 멀미에 시달린 후에는 하루종일 속을 달래기 바빠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남는 게 많지 않다. 그곳의 풍경이 어땠는지, 먹었던 음식이 무슨 맛이었는지, 심지어 가끔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문에 차를 탄다는 선택은 나에겐 엄청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 몇 안 되는 여행지 중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은 곳은 ‘도보’ 및 ‘기차와 전철’로만 이동했던 도시들이다. 거기에 버스나 택시가 끼어들면 그 전후의 기억은 통째로 흐릿하게 뭉개져버린다. 멀미로 인한 고통을 잊으려는 몸부림의 흔적이자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차를 타지 않는 여행은 기동성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제약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차라리 그 편이 여행으로서 더 만족스럽다. 몸은 고되지만 멀미에 시달려 진이 빠지지 않기에 오히려 힘들다는 느낌이 덜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혼자 -보통 분기별 또는 반기별로-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가볍게 가는 나들이를 즐기게 되었다. 당일치기로 훌쩍 다녀오기도 하지만, 다른 동네에 발을 들이는 만큼 호텔에서 1박을 하기도 한다(이때 호텔의 위치는 기차역이나 전철역에서 무조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여야 한다).


굳이 다른 지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호캉스를 하는 것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홀로 즐기는 호캉스라는 의미로 혼캉스라 부른다고 하는데, 마음에 쏙 드는 단어다. 동굴 같은 방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데도 가끔씩 견디기 어렵다 느낄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집 전체가 온전한 내 공간이 아니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어느 순간 호텔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나는 보통 겨울철과 여름철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호텔로 나만의 혼캉스를 즐기러 가곤 한다. 호텔에 가기 전에 그 동네 산책길이나 나름 명소로 알려진 장소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체크인 시간에 칼 같이 맞춰 룸에 들어간다. 여기서 욕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나에게 혼캉스란 욕조나 마찬가지다. 입욕제를 풀어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난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음악을 듣는 시간은 행복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겨울철 욕조는 따끈따끈한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로 몸이 노곤해지고, 여름철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반신욕을 즐기는 맛이 있다. 오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아침에 한 번. 욕조로 뽕을 뽑는 1박이다.


얼마 전 공덕에 있는 호텔에 들렀다. 호텔 체크인 전에 경의선숲길을 걷고 싶어서 가좌역에서 내려 공덕역까지 쭉 걸어가 보았다. 과거의 철로 잔해를 간직한 채로 전철역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겨울이라 꽃이나 나무가 휑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어 조금 아쉽긴 했다. 다른 계절에 오면 알록달록하고 푸릇푸릇한 풍경을 즐기며 찬찬히 걸어볼 만할 듯했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욕조 물부터 받았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생각보다 다리에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물이 식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반신욕은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여름철 나만의 바캉스를 기다릴 일이 남았다.


온전히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여유롭게 작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시간. 혼캉스 일정을 잡을 때면 언제나 기쁘고 설레곤 한다.

keyword
이전 09화다시,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