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사랑을 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나의 첫사랑, 그는 면도를 해도 턱 주위에 파란 자국이 남았다. 그는 까끌까끌한 그 턱을 신경 쓰는 듯했으나, 나는 좋았다. 내가 싫어할까 봐 그를 걱정하게 만드는 그 까칠한 턱이. 꽤 남성적인 생김새와 달리 그는 높은 음색의 서울말을 썼다. 그리고 나는 그것마저 좋았다. 그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반듯한 코였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뻣어 만지고만 싶은 코였다.
그날 나는 교정 내 가로등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하늘에서는 별들이 성성 거리며 반짝였고 여름의 시작이 그렇듯 기분 좋게 서늘한 밤이었다. 곧 저기 멀리서 그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내 앞에 당도한 그는 허리를 숙여 헉헉거리는 숨을 골랐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실린 비누향기에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생생 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기 멀리 있던 운명이 가까이 다가와 나를 조명하였고 달과 별들, 바람과 빛의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때 세상이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랐다. 참으로 젊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한 계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랑은 저만치 달아났다. 그리고 나는 오래 아팠다.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입이 까끌해서 먹을 수가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상상인지 꿈속인지 분간이 안 되는 세계에서 헤매다 시계를 확인하면 새벽 언저리였다. 이러다가 내가 죽겠다 싶을 때 엄마를 붙들고 악다구니를 썼다.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는 니가 부럽다. 니는 이렇게 젊은 날 그런 사랑을 해봤잖아.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엄마의 말이 뜻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인생에서 사랑이 날 비켜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우리 엄마 말대로 나는 이 젊은 날 눈부신 사랑을 했지. 내 전부를 앗아가는 듯이 아팠지. 악을 써도 진정되지 않던 내 가슴은 기억하고 있지 내가 사랑을 했다는 것을. 채 익기도 전에 따먹은 과일처럼 씁쓸했지만, 나는 보았어, 사랑을.
개학하기 이틀 전쯤 학교를 휴학한다고 그에게서 연락이 왔던가.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던가. 덥고 길었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붙들고 지겨우니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와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멍한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그날 내가 다른 옷을 입었다면, 내가 서울에 살았다면, 군대를 가겠다던 그에게 그래도 기다리겠노라 대답하지 않았다면하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높은 구두를 신고 절뚝거렸다. 내가 알던, 그리고 그가 알던 나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기에.
하루는 교양수업인 심리학 강의가 끝나고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가 왜 나를 떠났는지 아시냐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어째서 그러셨을까, 교수님은 한 시간이 넘도록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학생은 남자 친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네요. 그 친구는 학생을 어머니처럼 여기고 있고요.'나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절박해 있었고, 교수님의 말은 하늘의 계시처럼 내게 왔다.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든 그 순간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상한 타이밍이었지만 사랑이 떠난 후 나는 나를 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 그랬다 나는 너무나, 너무나 많이 아빠가 그리웠다.
나는 이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오랫동안 나를 속였다.
아아. 나의 아빠. 죄 많은 나의 아버지.
내가 가장 외롭고 쓸쓸할 때 나를 두고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나의 아빠.
오랫동안 증오했던 이.
그는 한때 우리 토깽이하고 나를 부르던, 가시 많은 생선에서 살만 발라 내 숟가락 위에 얹어두던다정한 아빠였다.
그때 나는 아빠를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하게 되었다.
아빠도 사랑을 했구나 하고.
아빠에겐 그 사랑이 지옥 같아도 결국은 걸어 들어가야 했던 길이었구나. 내가 그랬듯이.
그래, 사랑은 그토록 어리석은 것이지.
남편에게 물었다. 나를 열렬히 사랑했어?
남편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도 열렬히 사랑해 모르겠어?
그래,
지금 내게는 이토록 어리석은 당신이 있지.
착하고 한결같은 나의 남편! 우리 아이들의 성실한 아빠!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해주는 용감한 남자!
그래 여보! 나도 사랑해 열렬히!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가계부
오정희 작가의 옛 우물이라는 글을 읽고 오랜만에 나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오늘도 엄마로서의 일상을 살아간다. 내게 인생은 그런 것이다. 묵묵히 살아가는 것. 잠시 눈을 돌렸다가도 다시 아이들에게 달려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