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직장 선배 말을 듣고 주식 책을 몇 권 사서 읽더니 동학 개미(코로나 19이후 주식시장에 유입된 개인투자자)가 되었다. 우리는 우량주 단타(단기투자)가 아니고 장타(장기투자)라서 손해 볼일이 없다고 했다. 나도 내심 반가웠다. 남편과 나는 돈에 좀 어설프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긴 안목으로 10년, 20년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면 손해 보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오늘 주식판 돈으로 과일을 사 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사람일이 계획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더라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순간들이 파도처럼 몰려오면 거기서 허우적대다가 외딴섬 같은 생소한 곳에 무방비 상태로 당도할 때도 있다고. 신발 한 짝을 잃은 채.
남편이 생활비에 보태려고 주식을 한주 팔았는데 35만 원 정도 통장에 입금되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주식이 올라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단다. 하지만 나는 주식에 장기 투자하기로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일찍 팔았다는 사실이 어떤불길한 것을 시사하는 게아닐까 염려스러웠다. 예를 달면 쪽박, 폭망, 찢어진 가랑이 같은 것 말이다.
어쨌든 그 돈으로 아이들과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과일을 넉넉히 샀다. 체리, 수박, 바나나, 사과. 다른 건 몰라도 집에 과일은 절대 안 떨어지게 세심하게 관리한다. 과일에 있어선 사치스럽다.
대충 먹으면 되지, 주식까지 팔아서까지 과일을 먹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신가. 그 비밀은 바로 집안 내력에 있다.
우선, 할 수만 있다면 과일만 먹고살고 싶다던 우리 엄마의 고백이 들어보자. "누구야, 엄마는 다른 건 필요 없다. 옷 같은 거 사 오지 마라. 과일만 있으면 된다. 빈손으로 오기 뭐하면 과일 사온나. 엄마는 할 수만 있으면 과일만 먹고살고 싶다." 우리 엄마는 생존을 위해 밥과 고기를 먹지만, 과일을 훨씬 더 흠모한다. 텃밭에서 익어가는 열매들이 그리 예쁘고 사랑스럽단다. 과일 순이가 과일 종류를 가릴쏘냐. 안 좋아하는과일이 없는 엄마는 후각 세포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도 아주 잘 맡는데그 중 고기는 누린내가, 계란은 비린내가 난다며 가린다.
나도 우리 엄마 유전자 반을 타고 난데다 발현형질이 그런지, 고기에서 나는 누린내를 아주 잘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며 후루룩 쩝쩝 잘도 먹는 고기를 나는 못 먹을 때가 많다. 비린내 나는 해산물 또한 마찬가지다. 수렵 채집 시대에 태어났다면 생존에 유리했으려나? 이렇게 먹을 것이 많은 시대인데 음식을 가려먹는다니... 시대를 조금 잘 못 타고났다고 해두자.
이제 시댁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팔순 가까운 우리 어머니께서 음식과 관련해 자주 하시는 말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니끼하다(느끼하다), 또 하나는 속이 울렁거려서 못 먹겠다이다. 어머니께 예쁨을 받고 싶어서 친정에서 보내준 뽀얀 굴을 넣어 만든 미역국을 팔팔 끓여 대접한 적이 있는데 비리다며 입에도 못 대셨다.
그분의 아들인 우리 집 남편도 다를 게 없다. 남편은 채식주의자로 태어났으나 학습으로 잡식가가 된 케이스인데 중학생이 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고기를 멀리하는 이유는 역시 누린내다. 고기는 근 손실을 막기 위해 가끔 간식으로 닭강정을 먹을 뿐이다. 한술 더 떠서 양푼에 담은 국수도 비위에 거슬린다며(대체 왜?) 못 먹는다. 이 양반은 음식에 관한 한 시각 후각 미각 촉각 모두 예민하다.(후우. 맞다 이거 한숨 소리다.) 쉽게 말해, 사박자를 고루 갖추고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말해 무엇하랴, 아주 초 울트라 미식가이다. 특히 우리 첫째에겐단순히 입맛이 예민하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 입맛이 까칠하다는 표현이 맞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 까칠한 입맛이다.
첫째가 엄마 젖을 먹을 땐 몸무게가 70 퍼센타일 이상이었는데 모유를 끊고 나서 성장 속도가 지연되더니 3년째 되는 올해는 몸무게가 20 퍼센타일로 확 줄었다. 누가 보면 엄마가 애를 굶기나 하겠지만, 고기도 한우 안심으로만 구워주고, 쫄깃한 식감을 좋아한다며 3개에 만원 하는 전복도 심심치 않게 식탁에 올려줬다. 이런 아이가 그나마 과일은 잘 먹는데 아니, 과일엔 환장하는데 어미 된 내가 어찌 돈 없다고 과일을 끊겠는가.
변변찮은 음식 솜씨로 아이 입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데, 사탕 젤리 아이스크림을주는데 쪼잔하기까지 하면서, 과일 먹는 즐거움까지 뺏는다면, 그건 바로 유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