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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Mar 30. 2021

카레도 배달이 되나요?

저먼 베이커리에서 나와 숙소를 구하러 길을 나섰다. 성 안을 걷다가 정원이 아름다운 숙소를 발견했다. 푸릇푸릇한 나무가 우거지고 빨강, 노랑, 분홍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정원이었다. '호텔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인도에서 들렀던 곳들은 대부분 이름을 찰떡같이 잘 지은 곳들이 많아 신기했다. 전날 묵었던 데저트 보이스 게스트하우스는 옥상 뷰는 좋았지만 방에는 빛도 들지 않고 약간 음침했는데,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숙소의 분위기가 환해서 좋았다. 방 안 역시 훨씬 넓고 쾌적했다. 작지만 창문으로 밝은 빛도 들어오고 있었다.


이름부터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 호텔이어서인지 숙박비가 2배 넘게 비쌌지만 이곳에 묵기로 했다. 전날 숙소가 저렴해서 그렇지 사실 이곳도 한화로 계산하면 만원 정도였다. 인도나 동남아처럼 물가가 저렴한 나라를 여행하며 무언가를 결제할 때, 현지화로 계산하면 괜히 엄청 비싼 것 같아서 고민하거나 깎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사실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날도 그랬다.

    

방에 나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즐길 만큼 낮 시간에 숙소에 머무르는 일은 없었지만 집과 방은 밝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전신 거울도 있어서 밖에 나갈 때 옷매무새를 확인하기도 편했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은 깨끗한 화변기였다. 여행중이거나 외부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면 청결하지 않은 양변기보다는 오히려 화변기가 편했다. 이곳에도 옥상이 있었다. 성의 안 쪽에 위치해있어 시티뷰는 보이지 않았지만 푸릇푸릇한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방에 짐을 두고 나와 마을을 한 번 더 돌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들어가 보지 않았던 가게들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작은 골목길에 있는 아트 갤러리에 눈이 갔다. 그곳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구경을 해야 했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한 젊은 청년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마스떼. 들어가도 되나요?”

“나마스떼. 네 들어오세요”


갤러리는 몇 평 되지 않는 한 칸의 방이었다. 사방의 벽에는 빈틈없이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민화와 세밀화, 그리고 인도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리는 듯했다. 개중에는 새 혹은 악기를 그린 그림도 있었다. 그는 바닥에 앉아 커다란 판 위에 세밀화를 그리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나무 판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편하게 보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럭키. 가업을 이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또 금세 친해지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금지된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계급에 따라 결혼을 하는데, 슬프게도 그는 계급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여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연락하는 것을 집에 들킬까봐 휴대폰 유심칩을 두 개 사용하고 있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어떤 말로 답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결혼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것은 아주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씁쓸했다. 우리나라도 여전히 저 높은 상류사회에서는 아직도 정략결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는 내게 점심을 먹었냐고 물었다. 아직 먹지 않았다고 하자, 동네 카레 맛집에서 배달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한국만 배달의 민족인 줄 알았더니, 인도 카레도 배달이 되다니. 나는 좋다고 답했다. 배달도 빨랐다. 작은 쟁반 위에 카레와 난을 가져다주었다. 가격도 아주 저렴했는데 여기서 먹은 계란 카레와 난이 정말 일품이었다. 난을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뜯어먹었는데, 럭키는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외국인이 손으로 난 먹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 카레 그릇을 가져다주러 선셋 포인트 레스토랑에 함께 갔다. 역시나 이름을 잘 지은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일몰을 내려다보면 참 멋질 것 같았다. 럭키와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갤러리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위해 엽서를 그려주겠다고 했다. 저먼 베이커리에서 선물 받은 엽서 세트도 양이 많아서 사실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거절할 만한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남의 가게에서 밥만 시켜먹고 가기도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세장의 엽서를 만들어줬는데 각각 코끼리와 꽃, 고대 신화 속 한 쌍의 커플이 그려져 있었다. 엽서의 끄트머리에는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완성한 엽서를 건네며 그는 내게 가격을 말했다. 가격을 들은 뒤 나는 솔직히 그 엽서를 사고 싶지 않았다. 호텔 파라다이스의 숙박비보다도 250루피나 비쌌기 때문이다. 내가 당황하는 듯하자 럭키는 그림에 대해 마구 설명하기 시작했다. 종이는 이전에 어떤 용도로 쓰였던 종이인데 지금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종이라고 했고, 금가루를 섞은 물감이 들어갔다고 하며 금박지를 보여주었다. 말은 그럴싸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오래전 누군가 사용한 빛바랜 엽서들을 재활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금박지를 사용했다 한들 내게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기에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스님에게는 아베다 브러시가 필요 없듯이 말이다.


핸드메이드 작품이기도 하고 비록 한화로 계산하면 장당 가격은 몇천 원 정도이지만, 인도 물가로 치면 며칠 숙박비가 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가격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원치 않게 세장이나 사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찰제가 아니다 보니 원래 가격을 알 수 없어 다른 인도인들처럼 혹시 럭키도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건 아닐까도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에는 소심한 편이어서 차마 싫다거나 깎아달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기념으로 가지기로 했다. 어찌 됐든 럭키와의 대화는 즐거웠고, 카레가 맛있었으니 됐다.


럭키와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에서 나왔다. 골목을 거닐다 한 옷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현지에서 옷을 사입을 요량으로 옷을 몇 벌 가져오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날이 더워서 가벼운 옷이 더 필요했다. 델리의 옷가게보다 훨씬 괜찮고 맘에 드는 옷이 많았다. 이리저리 구경하는 내게 주인이 말을 걸었다. 스카프를 만져보고 있었는데,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스카프가 아니라 터번이라고 했다. 터번 만드는 법을 보여줬는데 무척 신기했다. 돌돌 말아 올린 터번을 내 머리에 씌워주고 사진도 찍어줬다. 여행객을 대하는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몸에 대어보고는 핑크색의 긴 허리치마와 꽃문양이 그려진 상의를 샀다.


숙소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날씨도 좋아 호숫가 산책을 가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벼운 옷을 입었더니 몸도, 발걸음도 가벼워 룰루랄라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오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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