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딕웰라
밥 한끼 잘 먹고 잤더니, 개운하게 눈을 떴다. 어부의 집밥은 허기진 마음을 배불렸다. B가 엔진 오일과 브레이크 오일을 체크하는 동안 나는 구글 지도에서 미리사(Mirissa)가는 길을 검색했다. 두 달 사이에 세 번째 미리사 여행. 미리사는 그만큼 남부 해안 관광지의 대장 격인 곳이다. 이번에도 미리사에서 적어도 사나흘 쉴 것이다. 사람도 뚝뚝도, 그리고 여행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되었다.
미리사까지는 고작 50km, 한 시간 반 거리다. 체크인 시간에 맞추려면 가는 길에 있는 명소에 들러 시간을 떼우기로 했다. R은, 이 글을 쓰면서도 이름이 헷갈리는 닐웰라(Nilwella)와 딕웰라(Dikwella) 그리고 마타라(Matara)를 지날 때 함께 보면 좋을 명소를 정리했다.
뚝뚝은 탕갈레의 골목길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해안도로로 들어섰다. 도로 중간에 배를 깔고 엎드린 개, 갑자기 튀어나오는 뚝뚝과 자동차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자리를 잡았다. 흐름에 알맞게 속도를 높였다. 사이드미러로 살핀 R과 B도 좁은 뚝뚝에서 각자 고안한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뚝뚝을 따라 날고 있는 독수리나 길가의 공작이나 물밖으로 눈만 빼꼼 내민 악어에게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아마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세 발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눈 여섯 개가 끔뻑 거리는 한 생명체로 보일 것 같다.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
30분 만에 닐웰라 블루비치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소박한 작은 마을에 있는 이 해변의 아름다움은 소박하지 않았다. 뜨거운 햇살에 비친 바다는 등 푸른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바다를 독차지할 수 있다면 알람 없이도 얼마든지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R은 이곳에서 수중 갤러리를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예술가의 작품이나 조형물을 가라앉히면 바닷속에서 시간을 머금고 멋진 화랑이 만들어진다. 마침 각종 해양 스포츠를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3명이고, 미리사에 머물 예정이에요. 수중갤러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미리사에서 닐웰라까진 약 35km, 한 시간 거리다. 하지만 거리나 시간은 점점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이제 한 몸이 되어버린 뚝뚝이 있으니까. 방학 새 키가 훌쩍 큰 아이들처럼, 나는 점점 더 높고 먼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닐웰라 옆에 있는 작은 마을 딕웰라(Dikwella)에는 특별한 사원, 웨우루칸날라 비하라(Wewurukannala Vihara)가 있다. 스리랑카의 수많은 불교 사원 중에서 이곳의 명성이 알려진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48m 높이의 좌불상이다. 부처님이 크고 넓고 견고해서, 나는 그에 비해 너무 작고 물러서 마음이 편해진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앞에 선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그런데 어깨너머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 하늘처럼 맑았으면, 아니 깨끗했으면 좋겠다. 머리도 마음도 내 것인데, 왜 내가 가지기 싫은 생각과 감정이 들어앉는 걸까.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에 쉬이 만족하지 못한다.
불교 사원은 서로 비슷하지만 다르다. '무엇이든 오케이' 할 것 같은 인자한 불상과 편안한 분위기인 곳이 있는가 하면, 이곳은 '복장, 소지품 검사부터 하겠습니다'라고 할 것 같은 건장하고 늠름한 불상과 경건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이 사원의 두 번째 특징을 짐작케 했다. R이 이곳에 오자고 한 이유는 지옥도 때문이었다. 사원 어딘가에 있다는 지옥 터널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심 깊은 스리랑카 사람들도 지옥을 묘사해 둔 사원은 익숙하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지옥을 보기 위해 앞으로 몰려들었다.
지옥 터널 입구에는 생전에 지은 죄를 심판하는 재판장을 표현해 두었다. 겁에 질린 사람 뒤로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형벌이 벽면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상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죄를 짓지 말아라,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라고 자주 일러주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순하기 때문에 불심에 마음이 기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거라면 평소에 잔소리를 좀 해주던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것도 모자라 밥맛도 뚝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사람을 분해하고 으깨고,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 형벌들. 천국이 어떤 곳인진 모르겠지만 지옥은 분명하게 알 것 같다. 바로 이런 게 지옥 그 자체다.
우리는 종종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과응보를 속으로 바란다. 하지만 나도 그 누군가의 인과응보이지 않을까. 경각심이 들었다.
딕웰라에서 매운맛을 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미리사를 목전에 두고 마타라(Matara)에 이르자 도시 규모도 커지고 사람도 차도 늘었다. 마라타 해변 바로 앞에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뚝뚝을 세우고 마타라 해변과 다리로 연결된 파레위 두와 사원(Parewi Duwa Temple) 입구에 섰다. 작은 섬에 있는 사원은 바다와 어울려 남다른 경치를 보여준다는데, 우리는 이미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지옥 터널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본 것 같은 기분 탓인지 힘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도시의 번잡함과 소음에 정신이 쏙 빠졌다. 더위도 한몫했다.
그런데 사원으로 가는 반듯한 다리 옆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부서진 다리가 보였다. 2004년에 스리리랑카 남부 해안을 집어삼킨 쓰나미의 흔적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쓰나미는 스리랑카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중 마타라의 피해도 상당했다. 아마 저 다리는 쓰나미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동시에 경각심을 잃지 않게 해 줄 것이다.
뚝뚝에 시동을 걸었다. 해변을 벗어나자마자 도심 한가운데 멋진 성벽이 나타났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만들고 18세기에 네덜란드가 재건한 마타라 성이었다. 고고하 모습이 그대로 남은 멋진 성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문 사이를 지나 액셀을 힘껏 당겼다. 미리사로 가서 며칠 푹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