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국물이 필요해
어릴 때 우리 가족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으려 하면, 숟가락을 집어 든 나를 보며 아빠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목이 까끌하니 국물부터 한 모금 마셔라."
그때의 나는 아빠의 말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기름칠하지 않아도 목구멍이 윤기가 도는 10대였으니 국물부터 마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나는 아빠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밥부터 먹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 나도 그 때의 아빠처럼 목구멍이 까끌까끌한 어른이 되었다. 목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따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마다 아빠가 했던 말씀을 떠올린다.
눈에 보이는 목주름은 고사하고 목구멍도 나이가 든다는 것을 몰랐다. 전에는 마른 밥 덩이를 잘만 넘겼는데 이제는 국이 없으면 밥 넘어가는 게 영 시원치 않다. 평범한 주말이면 우리 부부의 외식 메뉴는 보통 순댓국, 콩나물국, 샤부샤부 다 국물 위주의 메뉴다. 이러다가 삼시 세끼를 물에 밥 말아 먹는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뉴욕이 좋아도, 아무리 미국 음식이 입에 짝짝 달라붙도록 맛있어도,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이 아니면 국물 메뉴를 찾아보기 어려운 건 국물파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뉴욕의 날씨는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일교차가 컸다. 낮에는 여름처럼 강한 햇빛이 쏟아져 땀을 뻘뻘 흘리며 반팔로 활보하고 다녀도, 해가 지고 나면 당장 겨울이 올 것처럼 갑자기 쌀쌀해졌다. 그럴 때면 따뜻한 국물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날은 어학원 친구들과 함께 자유의 여신상과 메이시스 백화점을 다녀온 날이었다. 오전 10시에 배터리 파크에 도착해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과 이민 박물관이 있는 엘리스 아일랜드를 둘러봤다. 차가운 허드슨강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5시간 넘게 돌아다닌 탓에 몸은 녹초가 되었고, 하도 걸어서 발바닥까지 욱신거렸다.
나는 백화점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지고 숙소로 가려고 구글맵을 열었다가 잠깐 망설였다. 당장 숙소로 돌아가 몸을 뉘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저녁 식사로 인스턴트 라면이 아닌 제대로 된 따뜻한 국 한 끼가 정말 먹고 싶었다. 이대로 기숙사에 가서 뜨거운 물도 잘 안 나오는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잠들었다가는 다음날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길거리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국물 음식을 파는 곳을 검색하다가 '오리지널 수프 키친(The Original Soup Kitchen)'이라는 수프 전문점을 찾았다. 위치를 보니 숙소에서 멀지 않고, 별점도 높아서 망설이지 않고 바로 구글맵을 따라 이동했다.
지하철역에 내려 지도를 보며 서둘러 음식점으로 향했다. 주변을 잠깐 헤매다가, 노란색 간판으로 그게 쓰인 'SOUP'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그곳은 약 5평 남짓한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작은 가게였는데,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카운터 위에는 한국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10개 이상의 언어로 된 안내문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한국어 안내문은 번역기를 돌린 듯 문장이 어색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소엔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라는데, 다행히 내가 갔을 땐 저녁 식사 때가 지나서 그런지 한산했다.
메뉴를 살펴보니 랍스터, 새우, 감자, 치킨 등 다양한 종류의 수프가 있었다. 어떤 걸 고를지 고민하던 중 수프가 담긴 통을 보니 랍스터 비스크 수프가 유독 많이 팔린 게 눈에 띄었다. 안전하게 가장 인기가 많은 것으로 결정했다. 수프는 크기에 따라 3가지 사이즈로 나뉘는데, 나는 가장 큰 사이즈를 선택했다.
숙소까지는 도보로 20분. 이 따뜻한 수프를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나는 맨해튼 거리를 우다다다 경보하듯 빠르게 걸었다. "수프, 수프, 수프…." 머릿속엔 온통 수프 생각뿐이었다. 살짝 미쳐있었던 것 같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외투를 벗고 수프를 꺼내 보니, 수프 외에도 빵 한 조각과 사과, 초콜릿이 함께 들어있었다. 뜻밖의 한 상이 차려지자 먹기도 전에 온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수프는 아직 따뜻했다.
수프는 랍스터, 양파, 토마토 등 여러 재료로 만들어져 매우 진하고 든든했다. 랍스터의 짭짤한 맛과 고추의 매운맛이 어우러져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수프로 배가 채워질까 싶어 만만히 보고 가장 큰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수프가 되직해서 다 먹고 나니 배가 엄청나게 불렀다.
미국에 유명한 책 중 하나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가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이 책은 감동적인 짧은 이야기를 엮은 모음집으로, 희망, 사랑, 용기와 같은 긍정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제목이 이렇게 지어진 이유는, 미국에서 닭고기 수프가 감기에 걸리거나 마음이 힘들 때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음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 밤 내가 먹은 건 랍스터 수프였지만, 닭고기 수프만큼 내 영혼은 따뜻하게 위로받았다. 맨해튼에 온 이후로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던 것 같다. 온갖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맨해튼에서 하필 이 수프 가게를 찾은 그 누군가도 나처럼 온기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아참,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한국어 안내문은 좀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