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 해외로 나오면서, 철학서적만을 따로 싸서 보냈던 한국산 보자기를 서랍장에서 꺼냈다. 순결한 흰색과 화사한 분홍 사이에서 잠시 고민해 보았다. 역시 유쾌한 칼리할머니한테 어울리는 색은 화사함이 우월하다. 28송이 꽃이 핀 작은 꽃이불을 세 겹으로 수줍은 듯 고이 접었다. 분홍 보자기로 감싸 안아 리본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
사실은 꽃이불을 접기 전에,떠나보낼 편물을 내 침실에 펴놓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몸이 아픈 팔순 할머니의 이불이라, 이번에는 더 깊은 정성을 들였다. 코의 사이즈가 안 맞으면 풀어서 다시 일정하게 뜨고, 보푸라기가 있으면 실을 끓어서다시 정결히 이어 떴다.
그래도 그렇지. 왜, 내 안에선 망설이는 바람이 스쳐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새색시시집보낼 때 잡은 손을 놓치는 기분이랄까. 공들여 뜬 한 땀 한 땀이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이뻤다. 마음 저변에서,떠나보내기 아깝다는 파동이 잔잔히 일었다.나의 침실에 그대로 앉혀두고 싶었다.
할머니가 늘 들어오시던 문을 따고 나갔다.그녀 집으로건너가서 벨을 눌렀다. 벨이 고장 나 있었다. 돌아갈까, 하다가 하이 칼리, 아이고, 너네 벨 고장 났어. 소리가 안 나네. 내가 그녀네 뜨락에 서서 그러자 칼리는 부엌에서, 릭은 서재에서 쿵덕쿵덕 리듬을 타듯 걸어나오신다.
세상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반긴다. 두 분 다 외출복 차림이었다. 점심을 외식하고 2주마다 가는 할머니 치료차 병원에 다녀오셨단다. 할머니는아직 흰 붕대가 감긴 팔을 보여주신다. 얼굴 상을 살짝, 소녀처럼 찡그리다 바로 웃음으로 편다. 유쾌한칼리답게, 목소리 쟁쟁하고 기력생생하다.
꽃을 싼 분홍 보자기를 내밀자 할머니가 얼른 받아서 자기 품에 꼬옥 안는다. 바로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한다. 할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꽃이불에 얼굴을 대고 뽀뽀를 하자 건드리지 말라고, 할머니는 노, 노, 하며 할아버지에게 소리친다. 금방 암치료받고 온 팔순 할머니라 하면 아무도 안 믿을 듯싶다.
나는 28송이 꽃은 당신들 두 분을 위해 만들었다고 할아버지 편을 드는 체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또, 노, 노, 하신다. 그리고 얼른 자기 품에 가져다가 더 세게 껴안는다. 그러고 이런다. 유아 어 노티 걸!이라고 소리를 꽥, 지르듯 외친다. 불현듯 이웃집에서 웅성웅성하는 걸 보니, 어디서 싸움 났나 싶어 놀란 듯하다.
너는 장난꾸러기 소녀야!!라고 내 뒤에서 또 한 번 소리치는 할머니 소녀와 할아버지 소년에게 활짝 인사를 하고 나의 집으로 건너왔다. 마음이 뿌듯하고 깊어졌다. 고맙다는 백 마디 말보다 유머러스한 패러독스, 너는 장난꾸러기 소녀,라는 말로 대신 한칼리할머니가 소녀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