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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나만의 영역

전투는 영역 싸움이다

주짓수 고수들의 경기를 보다 보면 신기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대부분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유명 선수들의 경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들의 경기는 상대를 불문하고 승리를 따냈던 다른 경기들과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유명 선수의 상대라면 그에 못지않은 고수일 것이기에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에 맞춰 대비도 철저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는 매번 비슷하게 유명 선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그들의 경기를 볼 때면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알고도 당하는 걸까?"


꾸준히 주짓수를 하다 보니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짓수는 무엇보다 영역의 싸움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그 영역으로 상대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 되었던 셈이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주로 자신만의 영역에서 일어나기에 유명 선수는 매번 비슷한 방식으로 승리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만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먹잇감을 물고 재빠르게 늪 속으로 들어가는 악어처럼 말이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수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동작들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그 미세함만이 영역을 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듯 보였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단순히 많은 기술을 아는 것이 고수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수시로 기술 영상을 찾아보며 보다 많은 기술을 알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데 영역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누구라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신경을 쏟게 되었다. 전투에 있어서 많은 기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기술을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기술로 영역을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가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이변을 만들어 내는 선수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 또한 자신만의 영역을 촘촘하게 구축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실력자라 한들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특수한 영역 말이다.



이처럼 자신만의 영역은 전투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점은 전투는 우리의 삶에서도 수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찾아오기 마련이니깐. 전투의 상대는 라이벌과 같이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시험, 실연 등과 같은 일종의 시련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중에서도 유독 한 상대와 죽을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한다. 바로 돈이다. 그 녀석의 영역은 자본주의라 불린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속수무책으로 자본주의에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버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현실은 우리의 넋을 빼놓곤 한다. 한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던 ‘나의 내면’조차 자본주의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어서야 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여태껏 내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해왔던 공부와 치러 왔던 시험들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회사, 내가 하고자 하는 직무 또한 단순히 연봉에 비례했다. 연봉만 높다면 전공 따윈 언제든 버릴 수 있었다. 어차피 전공도 수능 점수에 맞춰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불현듯 과거에 봤었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피디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니?” 학생들은 입이라도 맞춘 것 마냥 같은 대답을 했다. “수능 잘 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기자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수능을 만점 받는다면 어느 대학, 어느 과를 가고 싶어?” 질문을 받은 학생의 95% 이상은 같은 대답을 했다. 문과의 학생들은 서울대 법학과였고, 이과의 학생들은 서울대 의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되었지만 나 또한 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쫓던 행복, 그 위에는 언제나 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성이라고 믿었던 나의 취향 또한 자본주의 안이었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패션에 관심이 참 많았었다. 주로 입던 청바지는 소위 프리미엄 진이라 불리던 고가의 청바지였고, 손목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명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 걸로도 모자라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헤드폰을 목에 걸고 다녔었다. 소리에 민감해서가 아니었다. 헤드폰도 패션의 일부라 생각했던 것이다. 누가 보기엔 저렴한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청바지고, 시계고, 헤드폰인데 나는 그러한 것들을 몸에 두르고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우쭐댔다. 소지품이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호감을 갖게 되는 이성 또한 그랬다. 세련됨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외모에 끌렸고, 될 수 있으면 세련됨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것들을 알고 즐기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 대상은 음식, 옷, 액세서리 등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내가 느꼈던 세련됨 또한 자본주의라는 영역 안이었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수 있는 고가의 탭이 달린 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유행에 한 걸음 앞선 것이 내가 느끼는 세련됨이었으니까. 그 세련됨은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드러나서도 안됐다.


내가 해왔던 행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소비라는 행위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한 행위다. 소비가 곧 나였던 셈이다. 문제는 소비는 객관식과도 같다는 것이다. 상품이라는 선택지 안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소비니까. 누군가가 나를 자기 멋대로 규정지으려고 한다면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네 가지 혈액형으로 나를 규정짓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소비 앞에선 그러지 못했다. 선택지가 무수히 많았기에 규정을 자유라 착각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의문이 들어야 마땅했다.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선택지 안에서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건가?", "결국 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기에 자본주의 안에서의 나는 ‘소외’라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내가 진정한 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니까.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것이 나인데, 여태껏 나는 돈에게 선택을 강요받은 채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과거 삶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듯한 불길한 기분에, 누군가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는데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몸은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영역에서 놀아나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도 없을 테니까. 살다 보면 어떠한 사실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릴 때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주짓수에 고수가 존재하듯 삶에도 고수는 존재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철학자들, 유행보다 메시지를 중시하는 뮤지션들, 전국 곳곳에 모여드는 운동가들,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려는 사람 등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 글, 음악, 목소리 등 각자만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저항과 동시에 자신만의 영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방식은 소비가 아닌 창조라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상대의 영역에 끌려 들어가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지만 전투를 포기하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그들을 볼 때면 체급을 불문한 엡솔루트 경기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상대와 대결을 펼치는 주짓수 선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인상 깊었다.


나는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로 인해 나만의 영역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메시지를 글에 담아보려는 것도 나만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소비의 패턴에도 변화가 생겼다. 매년 옷장을 들여다볼 때면 “대체 작년엔 뭘 입은 거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유행에 맞는 새로운 옷을 사기에 바빴지만 언제부턴가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구입하여 헤질 때까지 입게 되었다. 마치 주짓수 도복처럼 말이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 또한 달라졌다. 이젠 세련된 사람들보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을 닮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실 돈이라는 거대한 상대에게 승리를 거머쥘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현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영역에서 덜 놀아날 수는 있다. 나만의 영역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저항함으로써 말이다. 저항의 시간, 오직 그 시간만이 소외되었던 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난 그렇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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