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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타자와의 스파링

삶을 협소하게 만드는 '끼리끼리'라는 울타리

스파링을 하다 보면 깨달음이 오는 지점이 있다. 내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상대가 만들어 냈을 때, 그리고 내가 그런 상황을 잘 대처하지 못해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 때 주로 그렇다. 그런 스파링이 끝나면 머릿속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바둑의 복기처럼 그 상황을 머릿속에서 재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아도 대처법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경우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대처법을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서 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걸 우선으로 한다. 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샤워를 하면서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곤 하는데 가끔은 섬광처럼 번뜩 대처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 동작에 어떤 빈틈이 있어서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런 상황에 다시 이르게 된다면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할지 말이다. 신기한 점은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다시 발생했을 때 자연스럽게 대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익히게 된 동작들은 몸에 자연스레 베어 들어 잘 잊히지 않는 것 같다. 그 덕에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서 주짓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삶이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에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다. 차라리 제자리면 다행인 것이 하루하루 나 자신이 더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매일 보는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행동을 하고, 익숙한 대화를 나누는 하루가 어떠한 변화도 없이 반복되었고, 그런 일상에서 느껴지는 괴로움의 크기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나의 삶을 주짓수로 비유하자면 매일같이 똑같은 상대와 스파링을 한 셈이다. 그것도 내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결코 만들어 줄 수 없는 상대들과 말이다. 그런 상대하고만 스파링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실력은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습관을 반복하게 되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에는 타자라는 개념이 있다. 타자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나와는 삶의 궤도가 다른 존재를 뜻한다. 이질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와 부딪치게 되면 삶의 궤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예측할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스파링 상대가 타자와 같은 셈이다. 알다시피 그 덕에 나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서 주짓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삶에선 그 반대였다. 매일같이 지루함을 가져다주는 사람들만을 만났을 뿐이었다. 심지어 타자를 마주치더라도 그들을 배척하기 바빴다. 나와 삶의 궤도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 거기서 비롯되는 불편함이 싫었던 것이다. 당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직면할 때면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혹시나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해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이다. 주짓수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타자와의 스파링을 꺼려할 수 있는 것처럼, 삶의 경험이 부족한 나는 타자와의 만남을 꺼려했던 것이다. 그동안의 나의 삶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끼리끼리 논다.’


삶이 지루하다는 말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좁게 느껴진다는 말과도 같다. 즐겁게 하던 게임도 세계관이 좁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금방 지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게임은 지루해지면 다른 게임을 접해 다른 세계관을 맛볼 수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루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기존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기존의 안경 대신 새로운 안경을 낌으로써 말이다. 나는 새로운 안경이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내 삶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새로운 안경은 타자의 안주머니 속에 있었으니까.


주짓수와 삶, 그 양 끝을 경험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바로 타자의 소중함이다. 내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불러오기에 처음엔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불러오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보다 넓은 시야를 선물해 주는 존재가 바로 타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마주치게 되는 타자는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타자는 우연으로서만 만날 수 있기에 그 소중함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말이 허무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확률을 높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끼리끼리'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음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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