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주짓수를 하다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게 되었다. “자꾸 스윕을 당하는데 어떻게 해야 스윕을 안 당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이다. 먼저 주짓수의 ‘스윕’이라는 용어를 알기 위해선 두 가지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드 포지션과 탑 포지션이다. 가드 포지션은 바닥에 엉덩이나 등을 덴 상태를 뜻하며, 탑 포지션은 바닥에 무릎을 꿇거나 서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스윕은 가드 포지션인 선수가 탑 포지션인 선수를 넘어트려 자신을 탑 포지션으로, 상대를 가드 포지션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내가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해야 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와도 같은 셈이다.
주짓수에서 스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관건이다. 상대가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 타이밍에 팔과 다리로 땅의 적소를 짚으면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가 있다. 문제는 상대가 팔이나 다리를 제압하여 땅을 짚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한쪽 방향의 팔과 다리를 동시에 제압당하게 되면 스윕을 막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팔을 제압당하면 다리는 제압당하지 않게 신경 써야 하고, 마찬가지로 다리를 제압당하게 되면 팔은 제압당하지 않게 신경을 써야만 한다. 하지만 초보일 때는 이 점을 신경 쓰기가 어렵다. 넘어질 것 같을 때 땅을 디딜 준비를 하지 않고 상대를 부여잡아 더 쉽게 스윕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에게 질문을 한 회원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상황을 재현해가면서 차근차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세요. 오른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저에게 오른쪽 팔을 제압당했죠? 그러면 오른쪽을 디딜 팔과 다리가 없게 된 거예요. 그러니 가정해보세요. 나는 오른쪽으로 넘어진다 하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자연스럽게 무릎 꿇었던 오른 다리를 펴서 땅을 딛게 되죠? 사람이 넘어질 때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순간 팔이나 다리로 땅을 디뎌 균형을 잡게 되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겁니다.” 비슷한 상황을 몇 번 재현하니 회원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게 말했다. “아하! 무너질 준비를 하면 되는 거군요! 감 잡았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참 좋은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나는 무너질 준비라는 표현에 꽂히게 됐을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너질 준비를 해야 한다니 참 아리송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대체 나는 언제 무너지게 되는 것일까? 내게 있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너질 준비는 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아,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너지게 될 때. 어떤 방법으로도 무너짐을 막을 수가 없던 때. 못마땅함이라는 녀석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려서부터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 선생이란 자에게 마대자루로 맞아 살색의 엉덩이가 보라색으로 변하게 될 때도 그 변화가 얼굴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래선지 친구들은 나를 포커페이스라 부르곤 했다. 대체 언제 표정이 변하게 되는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화를 끝까지 쌓아둘 수 없듯 내 포커페이스라는 가면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포커페이스라는 가면 안쪽은 웬만한 감정들은 다 담아둘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컸지만 못마땅함이란 녀석만큼은 담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정원 이상의 사람이 타면 경고음과 함께 문이 열리듯 가면 안에 못마땅함이 담기는 순간 가면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운이 나빠 못마땅함이 마지막에 탔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게감을 느껴보니 빈 엘리베이터에 못마땅함이 혼자 탔어도 분명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금이 간 가면 뒤엔 그동안 쌓인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응어리져 있었다. 그 응어리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오랜 시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아마도 살면서 큰 문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깨끗해 보이는 유리도 환한 곳에서 들여다보면 얼룩들이 보일 때가 있듯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빛이 비추어질 땐 연애를 할 때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빛이 비추어질 때면 내 모습이 어떤지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얼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얼룩은 나의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나를 무너뜨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마땅함을 느끼게 되어 그것이 표정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표정을 보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무너졌다. 그런 일이 있는 날 밤이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유리가 닳도록 얼룩을 닦아내야만 했기에. 난 그 얼룩이 새로 산 옷에 튄 음식물처럼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겐 못마땅함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자신감 때문이다. 자기비하에 대한 자신감이다. 자기비하와 자신감은 어울릴 수 없는 사이지만 나는 자기비하에 자신감이 붙을 정도로 자기비하가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느끼는 나는 언제나 대단한 사람이 아닌 볼품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비하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를 낮추는 행위가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했다. 내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나를 낮출 수 있으니깐. 그건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그 분야에서 만큼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깐.
하지만 못마땅함은 내 마지막 희망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였다. 못마땅함은 한 가지가 가정되어야만 생길 수 있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보다 높다는 것이 가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높은 나와 낮은 너, 그 간극에서 태어나는 감정이 못마땅함인 것이다. 그럴 때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그 위로는 외줄 타기와 같이 위태롭기만 했다. 한 사람에게 향했어야 할 나를 낮추는 행위는 방향을 바꾸어 또다시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옆에 있어줄 사람도 못 되는구나.” 사회생활, 그 낮음의 위치에서 지칠 대로 지친 한 사람을 애인이라는 사람 앞에서도 낮음의 위치에 서게 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시야에 한 사람만 들어와도 혼자서는 완벽히 해내던 일도 잘 안 되는 법이다. 그런데 거기엔 나를 낮추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를 높음의 위치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선 나를 무너트려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를 무너뜨려야만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무너짐으로써 생겨나는 작디작은 공간에서 내 옆 사람이 잠시나마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으면 한다. 내가 무너질 준비라는 말에 꽂혔던 이유가 이런 이유에서 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나를 무너트릴 준비를 해야만 했으니까. 이러한 태도가 사랑하는 사람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거란 생각도 든다. 세상 모든 사람은 둘도 없는 귀한 집 자식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