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에이션(variation). 변화를 뜻하며 음악에서는 어떤 기본적 성격의 선율은 바꾸지 않고 리듬이나 화음을 변화시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베리에이션은 주짓수 기술을 배울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A라는 기술을 배우고 나면 A-1, A-2, A-3 같은 식으로 기술에 변화를 주고 그것을 연결하여 배우게 되는 것이다. 변화를 주는 목적은 영어 단어를 암기할 때처럼 익히기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의 카운터 때문이다. 내가 A라는 기술을 사용하면 상대는 -A라는 카운터 기술을 사용할 것이기에 나는 A라는 기술을 A-1, A-2, A-3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변화에 익숙해질수록 상대방보다 빠르게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선수를 칠 수 있게 된다.
가끔 사람들은 관장님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A라는 기술을 시작으로 A-1, A-2, A-3까지 갔는데, 상대도 그에 맞춰 -(A-1), -(A-2), -(A-3)라는 카운터 기술로 따라오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그럴 때면 관장님은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답을 해주신다. “그땐 다시 A가 통합니다.” 기술을 다시 연습해보면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복잡하게 생각해 A-4는 뭘까, A-5는 뭘까 고민했지만 실은 다시 A로 돌아가면 되는 단순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모든 기술에는 그에 맞는 해답이 있구나.” 주짓수에 있어 진리를 논할만한 위치는 아니지만 여태껏 내가 느낀 바로는 이것은 진리에 가깝다. 각각의 기술에는 각각의 카운터가 존재하며, 그 둘은 서로의 꼬리를 먼저 물기 위해 끊임없이 돌고 돈다.
주짓수 세계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내 생각에 그 기술은 절대적이야, 그러니 나는 그 기술만 연습하겠어.”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짓수를 조금만 해보더라도 그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술에 빈틈이 없어 보여 집중적으로 연습해보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카운터를 알고 있는 상대에게 처참히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짓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A가 있다면 -A가 있는 법이다. 즉, 세계관에 통용되는 진리가 있다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인 셈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삶이라는 세계관에서는. 주위를 둘러보면 하나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속칭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 문제는 그들이 반드시 ‘틀림’을 낳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너무도 쉽게 틀린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꼰대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성장이란 부모님을 시작으로 그런 어른들에게 틀린 사람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치는 발버둥과도 같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다짐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지만 현재의 나는 꼰대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기존의 꼰대를 욕하는 새로운 꼰대가 된 것일 수도 있다. 꼰대는 꼰대인 걸 몰라야 꼰대이기에.
사실 그동안의 나는 내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면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기 바빴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하나로 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다. 꼰대의 눈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미성숙해 보이기 마련이니깐.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가치관에 카운터를 날리는 타인을 혀를 차고 손가락질할 존재가 아닌 환영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내가 가진 A라는 가치관은 -A라는 가치관을 가진 타인에게만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절대적인 가치관이 무너져야만 ‘틀림’이 ‘다름’으로 전환될 수 있다. 틀림이 다름이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올바른 나도, 그릇된 너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는 완전한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아이들이나 반려견의 눈빛을 떠올려보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때가 있으니깐. 아이들과 반려견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준다. 어떠한 필터링도 없는 투명한 눈빛에 비친 나는 결코 이전의 나와 같은 존재일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기 바빴던 타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내가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가치관이라는 동아줄을 썩은 동아줄로 만드는 일이며, 그동안 내가 옳다고 믿고 행했던 행동들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기에. 그렇기에 내게 카운터를 날리는 사람을 환영하는 일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차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나하곤 가치관의 차이가 큰 사회적 소수자들에겐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 힘든 일은 환영이 멈춰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번의 환영으로 나의 가치관이 A에서 A-1로 변하게 되었더라도 거기서 멈추게 된다면 새로운 꼰대가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A-1), -(A-2), -(A-3)...이라는 카운터를 날리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면 차던 혀를 멈추고, 피던 검지를 굽히고 왜 나는 그들을 틀린 사람으로 여기려 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짓수에서 절대적인 기술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듯, 삶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으니까.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주짓수에서도, 삶에서도 진리가 있다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 진리는 결코 ‘멈춤’하고는 타협하지 않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