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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걸음이 느린 아이

느려 터져도 주짓수는 할 수 있다

도복을 입고 하는 운동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라. 여러 가지 이미지가 떠오르겠지만, 그중 흰 도복에 검은 띠를 맨 늠름한 사람의 이미지가 빠지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도복을 입어야 하는 운동의 종류는 많다. 주짓수뿐만 아니라 태권도, 유도, 가라데, 삼보 등 그 수를 헤아리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짓수에는 유독 특별한 점이 있다. 검은 띠를 는데 까지 약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이다. 그 10년도 빨라야 10년이다. 검은 띠까지 1년 남짓 걸리는 태권도나 유도와 비교해보면 그 특별함이 더 눈에 뜨일 수밖에 없다. 나는 주짓수를 하며 그 사실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주짓수를 5년 넘게 하고 있지만 아직 모르는 기술이 더 많을 정도로 주짓수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주짓수 시합에서는 이변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복싱이나 무에타이 등 타격 계열의 스포츠 시합에서는 얼마 배우지 않은 선수가, 특히 운동신경이 좋은 선수가 이변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주짓수 시합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대게 오랜 시간 꾸준하게 수련한 사람이 승리를 거머쥔다. 주짓수에서 만큼은 꾸준함이 운동신경을 뛰어넘으며, 곧 강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짓수에서는 다른 어떤 자질보다 꾸준함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이 말은 주짓수 실력은 아주 느린 속도로 향상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짓수의 이러한 특징 때문인지 그 특유의 느림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짓수를 할 땐 움직임조차 느려도 된다. 상대와 겨루는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스피드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많다. 빠른 스텝을 이용해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혀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복싱이고, 상대를 부여잡아 바닥에 메치는 것이 유도다. 그 속도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슬로우 모션으로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다. 하지만 주짓수는 조금 다르다. 빨라서 나쁠 건 없지만 느리다고 해서 반드시 빠름에 밀리는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주짓수를 모르는 사람이 주짓수 경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지루하다는 말이다. 서로 엉겨 붙어 도통 뭘 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텝도 보기 어렵고, 심지어 겨루고 있는 선수의 표정에선 평온함이 묻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을 봤을 때 주짓수만큼이나 ‘느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싶다.



주짓수와 나는 이 ‘느림’에서 통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느려 터졌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가족들과 외출을 하게 되었을 때가 기억이 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가족들은 신발까지 신고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제 서야 양말을 신고 있는 내 모습이다. 그럴 때마다 문밖에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느려 터졌니?” 목소리엔 언제나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향인 건지 나의 느림은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가족들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려 터진 놈이 군대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하고 말이다. 실제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선임들보다 밥 먹는 속도가 느려 한동안 갈굼을 반찬 삼아 눈칫밥을 먹었다. 군생활로 인해 내가 빨라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빨라지나 싶었지만 전역 후엔 다시 원래의 속도로 되돌아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뭘 하던 느린 사람이다. 심지어 주짓수를 할 때마저도 꽤나 느리다.


하루는 밥을 먹는데 친한 형님께서 말을 꺼냈다. “너 밥 먹는 모습을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바쁜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급하게 먹게 되는 건지 참.” 비단 형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빠름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현대사회에서 시간의 단축은 곧 효율의 증가를 뜻하기에 사회의 한 자리를 꿰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빠름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뭘 하든 가능한 한 빨라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심지어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해야 한다. 그렇게 빠름은 우리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무의식적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습관은 사소한 발걸음에서부터 드러나곤 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 속도에 적응이 잘 안됐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속도는 나에게 벅차기만 했다.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비롯해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던 것 같다. 현대사회를 빠르게 달리는 열차로 비유하자면 나는 전력 질주하여 열차를 붙잡았지만 그 속도에 못 이겨 얼마 못가 내동댕이쳐진 꼴이었다. 열차가 떠난 후에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나처럼 내동댕이쳐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혹여나 열차에 제대로 탑승하게 된 사람일지라도 뛸 때 방해가 되는 것들은 죄다 내려놓아야만 했을 것이다. ‘나’라던 가, ‘너’라던 가. 훈련소에 들어갈 때 사적인 물건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강제에 가깝다. 그렇게 내가 아닌 군인이 되어가는 것처럼 내가 아닌 사회인이 되어간다.


문명은 계속해서 발전한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통점은 ‘인간에게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하기 위해’ 일 것이다. 그런 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사회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다. 그래선지 우리는 과거에 비해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현재를 긍정하곤 한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특히나 삶의 속도 면에 있어서 말이다. 야생의 삶을 보면 이러한 의구심이 이상하지 않게만 느껴진다.


야생동물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만의 속도를 만끽하며 보낸다. 사냥할 때만큼은 예외지만 동물들은 욕심을 부려 필요 이상의 사냥을 하진 않는다. 달리 말하면 동물은 미래를 위한 노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야생의 삶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배고플 때 먹잇감이 보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있고, 안전한 보금자리 없기에 언제든 천적들에게 사냥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현대사회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만 하니 말이다. 그럴 수 없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물론 그만큼 나만의 속도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문명은 발달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속도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고민은 해서는 안 될 사치로, 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나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간다는 건 터무니없는 이상이 돼버린 지 오래다.


현대사회에서 나를 지켜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회의 속도에 나를 맞추지 못하면 여지없이 사방에선 질타가 날아든다. 그런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슬로우’ 문화가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슬로우’는 자기만의 속도를 잃어버린, 그렇게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위안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짓수는 그 ‘슬로우’에 어울리는 운동이라 생각한다. 느려도 되는 주짓수에서는 그만큼 자기만의 속도를 살릴 수가 있다. 열차로부터 내동댕이쳐진 나는 사방에서 질타가 날아들 때면 주짓수를 하며 위안을 얻는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자신만의 속도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 시간은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모두가 ‘나’여도 괜찮은 시간을 조금씩 늘려나가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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