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 에세이] -홀릭

삶에 필요하기도 한 중독

반복되는 하루가 지긋지긋했던 나에게는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었다. 무언가의 홀릭이 되는 것. 홀릭이 된다는 건 잠잠했던 삶에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과도 같으니 말이다. 스스로에게 “현재의 나는 무엇의 홀릭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한데 여전히 내 삶에는 이 단어에 어울릴만한 대상이 드물기만 한 것 같다. 대상을 하나 꼽자면 가장 먼저 주짓수를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가 않았던 주짓수는 나의 삶에서 홀릭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만 같다.

고등학생 시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이종격투기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폭력을 혐오하던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이종격투기라는 폭력적인 스포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상 속 사람들은 맞아서, 목이 졸려서 기절을 했다. “뭐야?, 죽은 거 아니야?” 무척이나 충격적이었기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왜 이종격투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지. 하지만 매일같이 영상을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종격투기는 말 그대로 여러 종류의 격투기가 융합되어 있었다. 복싱, 무에타이, 레슬링 등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이라면 뭐든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건 주짓수였다. 만화책에서나 봤었던 유술이 실전에서 통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어떤 무술보다 비폭력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도 크게 한몫 차지했다. 주짓수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있다.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하고 싶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육시간을 싫어했을 정도로 운동에 관심이 없던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당시엔 주짓수 체육관이 서울 몇 곳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아 배울 여건이 마땅치가 않았다. 하고는 싶은데 할 수는 없는 상황은 길어졌고, 그러는 와중에 여러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군대에 있을 때 일어났다.

나는 병장이 되었을 때부터 사이버지식 정보방을 들락이며 주짓수 영상을 찾아보았었다. 내무실로 돌아왔을 땐 후임들을 상대로 영상으로 배운 주짓수 기술을 연습했다.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하루는 운동을 좋아하던 후임을 상대로 트라이앵글 초크라는 기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물론 연습하기 전 탭이란 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초크를 걸었지만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후임은 처음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잘 못 걸었나 싶어 다리에 힘을 주어 꽉 조여 봐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기술을 푸는 순간이었다. 후임은 눈이 풀린 채 기절을 해버렸다. 처음 당해보는 초크였기에 느낌이 낯설었는지 버티고 버티다 기절해버린 것이다. 살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때를 꼽자면 단연코 이 때다. 주짓수에 ‘주’자도 몰랐던 나는 후임이 죽은 줄만 알았다. 순간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고,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살아온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후임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본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렸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맛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 건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후의 나의 태도였다. 나는 다짐했었다. “이제부터 후임들한테 말고 동기들한테 기술을 걸어야겠다.” 한동안 동기들은 미친 사람인 양 나를 피해 다녔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을 시점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주짓수 체육관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렜다. 날짜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이런 게 바로 운명인가 싶었다. 어떠한 고민도 없이 다음날 체육관을 방문했다. 상담 후 바로 등록을 하였고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운동은 오늘부터 가능한가요?" 관장님은 대답했다. “그럼요, 지금 스파링부터 해봅시다.” 당황스러웠다. 평일 대낮이었던 지라 체육관에는 관장님과 나 단 둘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링은 시작되었다. 무척 긴장됐기에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도 그동안 영상으로 배웠던 기술들을 시도해보려 애를 썼다. 관장님이 봐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레그락’이라는 기술을 성공시켰을 땐 소리치며 기뻐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관장님께서는 당시 무척이나 놀랐다고 했다. 처음 스파링을 하는데 그 정도로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다 다를까 나는 시작과 동시에 주짓수에 푹 빠지게 되었다. 비슷한 때 시작한 누구보다 잘했고 열정이 넘쳤다. 학창 시절 질문이라곤 한 번 해 본 적 없는 내가 주짓수 기술을 배울 때면 질문을 퍼붓기 일쑤였다. 그 걸로도 부족했는지 시간이 날 때면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주짓수 영상을 찾아보았다. 체육관에 갈 때면 관장님을 찾아가 영상으로 보았던 기술의 디테일을 물어보며 귀찮게 굴기도 했다. 점차 나의 삶에서 주짓수의 비중은 커져만 갔다. 자연스럽게 몸에는 주짓수에 적합한 근육이 붙었고, 주짓수에 관한 생각은 머릿속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짓수로 인해 육체에도 정신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핑계에 가깝지만 과거 취업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또 그것이 이어져 직장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주짓수를 오랫동안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는 담배홀릭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나의 머릿속에서 주짓수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주짓수를 다시 시작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제대로 익혀두었던 몸짓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탈 때처럼 의식은 못했지만 몸은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처럼 무언가의 홀릭이 되면 삶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변화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기도 하다.

티비를 보다 보면 우연찮게 ex-홀릭들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과거 무언가의 홀릭이었던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뒤늦게 동성애를 질병이라 여기며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과거의 애인을 웃음 코드로 전락시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편함 마음이 들었다. 어찌 됐든 그러한 대상에 홀릭이 되었던 건 자기 자신이고, 그 대상을 부정한다는 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도 같으니 말이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와 같은 과거 자신에 대한 부정은 딱 그 크기만큼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완전히 동떨어질 수는 없으니까.

세상에 완전한 건 존재하지 않듯 주짓수 홀릭은 나에게 좋은 것만을 남긴 건 아니다. 다쳤던 뒷목에는 주기적으로 목 디스크와 비슷한 증상들이 찾아오고, 무릎인대가 파열되는 부상 탓에 하체를 조금만 무리해서 사용하면 무릎에 통증이 찾아온다. 손가락은 잦은 골절 탓에 울퉁불퉁해졌고, 다쳐서 약해진 손가락은 쉽게 또다시 골절되곤 한다. 가끔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목을 잘 못 움직이거나 다리를 절 때면 어머니는 왜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주짓수를 하는 거냐고 소란을 피우곤 하신다. 나이를 먹게 되면 과거에 다쳤던 부위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겪고 있으셔서 그런지 요즘 들어 부쩍 더 걱정이 많아지셨다.

한데 나는 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기보단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져 불어 닥치는 바람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럴 거라고. 그 바람이 주짓수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바람으로 인해 내가 충만해졌든 파괴되었든 어찌 되었든 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홀릭은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까지 주짓수홀릭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