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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띠의 양면성

머릿속에 새겨진 띠의 체계에 관하여

흰색, 파란색, 보라색, 갈색, 검은색. 주짓수 띠의 색깔이다. 주짓수에서는 초보일수록 흰색에 고수일수록 검은색에 가까운 띠를 매게 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태권도를 배웠었기 때문일까? 나는 이러한 띠 체계가 익숙하기만 하다. 당시 태권도 도장에 가면 동네 친구 모두를 볼 수 있었을 정도로 태권도를 배우는 건 하나의 관습과도 같았다. 어렸던 나와 친구들은 '강함'에 관심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비교할 대상만 있으면 "얘랑 쟤랑 싸우면 누가 이겨?"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태권도 도장에서는 달랐다. 아이들은 띠 앞에선 더 이상의 의문을 갖지 않았다. 높은 띠를 맨 사람이 더 강하다는 건 어린아이들조차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아이들은 유독 띠의 색에 민감했다.


주짓수를 하다 보면 어른들 또한 띠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높은 띠를 맨 사람 앞에서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반대로 자신보다 낮은 띠를 맨 사람에게 패배라도 하게 되는 날엔 한동안 자존심을 상해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매고 있는 띠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 같아 부담감을 느끼기도, 반대로 자만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머리로는 그럴 필요 없다고 되뇌어보지만 마음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질 않는다. 아마도 다른 운동에 비해 승급이 어려운 주짓수이기에,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스파링을 해야만 하기에 띠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나의 삶과도 맞닿아 있었다. 도복 위의 띠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나는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 사람들이 매고 있는 띠의 색에 민감했다. 띠는 학벌이 되기도, 권위가 되기도, 나이가 되기도, 실력이 되기도, 힘이 되기도, 외모가 되기도, 돈이 되기도 했다. 물론 주짓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러한 띠 앞에서 의기소침해지기도, 자존심을 상해하기도, 부담감을 느끼기도, 자만하기도 했다. 문제는 띠의 색에 신경을 곤두세울수록 주짓수를 즐기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듯,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띠의 색이 무엇보다 큰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어떤 띠의 체계도 사람에 따라 합당하게 느껴질 수도,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주짓수의 띠의 체계 또한 부당하게 여겨질 수 있다. 거기에다 자신을 승급시켜주는 스승이 스승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띠의 체계에 불만이 있다면 주짓수를 안 할 수 있다. 스승이 불만이라면 체육관을 옮길 수도 있다. 언제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사회는 내가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도 전에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강요라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내 머릿속에 새겨진 띠의 체계, 즉 높고 낮음이라는 가치 판단의 기준은 주입식 교육처럼 사회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시작으로 그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강요받는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나를 승급시켜 주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공부를 잘해서, 높은 직위에 올라서, 돈을 잘 벌어서, 예뻐져서 보다 높은 띠를 매기만 하면 그만인 세상인 것이다. 생각해볼 여지는 익숙함이 덮어버렸기에 '왜?'라는 질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심지어 이제는 서로의 시선이 사회적 강요를 대체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띠의 색을 알아보고 그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게 된 것이다.


그 높고 낮음의 기준이 부당하다는 사실은 나의 보상심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낮음의 기준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쉽사리 불쾌해지곤 했다. 학벌이 낮다는 이유로, 직급이 낮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외모가 별로라는 이유로, 속된 말로 총칭하여 ‘깝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될 때면 줄을 서다 새치기를 당했을 때처럼 깎아내리기 바빴다. 과거 군대에서 선임이 됐을 때, 내 눈치를 보지 않는 후임들을 볼 때면 해코지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때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쟤는 하네?" 다시 말해 내가 따른 룰을 너도 따라야 한다는 못돼먹은 보상심리인 것이다.


다행히 반복의 힘 앞에 장사는 없었다. 비슷한 상황을 주짓수에서도 삶에서도 이중으로 겪다 보니 그동안 고집을 굽히지 않았던 나의 내면조차 변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띠의 색을 떠나 서로 즐겁게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띠라는 체계 앞에서 좀 더 의연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삶에서도 그랬다. 회사에서든 어디에서든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함께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까다롭기로 소문난 직장상사와 같이 이전에는 눈치 살피기 바빴던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의견을 가감 없이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연봉, 학벌, 외모와 같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기준 앞에서도 예전만큼 기죽지 않게 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딛어야 할 대상은 옆 사람이 아니었다. 딛어야 할 대상은 내 머릿속에 새겨진 띠의 체계, 즉 높고 낮음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과거부터 지속된 “왜 저 사람은 나처럼 줄을 서지 않는 거지?”라는 불쾌함에 사로잡힌 생각은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그들, 사실 나는 나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그들이 불편했던 것이다. 깊이 들여다봐야 할 대상은 그들이 아닌 나였다. 갖았어야 할 의문은 다름 아닌 “왜 나는 줄을 서고 있는 걸까?”였다. 그것도 이미 순서가 정해져 앞지를 수도 없는 줄을. 부당하기만 한 그 줄을.


어느 날 관장님께서 체육관 밴드에 캡처한 사진 하나를 올리셨다. 주짓수 웹툰인 ‘라스트 서브미션’의 한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다른 주짓수 도장 오픈 매트에 가서 블랙벨트랑 스파링 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블랙벨트인 게 너무 부러워서 스파링 끝나고 블랙벨트가 되면 어떤 기분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랬어요. 블랙벨트 돼도 뭐 없다고. 그냥 도장 와서 가족 같은 도장 사람들이랑 즐겁게 스파링하는 게 전부라고. 그리고 자신은 그게 너무 좋다고...”


얼마 전 검은 띠를 허리에 두르신 관장님께서는 사진 밑에 짧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맞는 것 같습니다.”



주짓수에서 검은 띠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은 띠의 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인가 보다. 아니, 어쩌면 검은 띠는 띠의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허리에 두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띠의 색에서 비롯되는 여러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했기에,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고 또 숙고했기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마지막으로 매게 되는 띠는 화려한 색에 비하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검은 색인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은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모두가 띠의 체계를, 다시 말해 원치 않게 머릿속에 새겨진 높고 낮음의 기준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에서 만큼은 검은 띠를 매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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