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주짓수 놀이

놀이의 천적 '성과'

여전히 주짓수는 여성분들에게 생소한 운동인 것 같다. 방송에서 언급되면서, 또 체육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주짓수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늘어났지만 그것이 체육관 등록으로 이어지기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있는 듯싶다. 나는 호기심에 여성회원분들에게 말을 건네곤 한다. 어떻게 주짓수를 시작하게 되었냐고 말이다. 대답은 다양하다. 주짓수가 시간당 칼로리 소비량이 가장 높은 운동이라는 걸 알게 되어 다이어트 목적으로 주짓수를 시작한 분도 있었고, 호신을 목적으로 배우게 된 분도 있었고,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아 시작한 분도 있었다. 이유를 따져보니 남성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회원분은 7년의 고민 끝에 주짓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캐묻지는 않았지만 고민이 길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소 거친 운동이기에, 누군가와 겨뤄야 하는 운동이기에, 겨뤄야 하는 상대가 남자가 될 수도 있기에, 혹은 이와 비슷한 다른 이유 때문에. 하지만 주짓수를 시작한 이후엔 재미가 붙었는지 주기적으로 체육관에 나오셨다. 게다가 7년이라는 시간이 아쉬웠는지 스파링을 할 땐 아쉬움의 크기에 비례할 법한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그녀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했다. 열심히 하던 때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표정과 몸짓이 보였다. 스파링이 끝나고 대화를 나눠 보니 실제로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했다. “스파링을 하면 매일 똑같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요. 느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재미가 없어졌어요.” 이것이 그녀가 스파링에서 불리한 상황에 빠졌을 때 발버둥 치기보다 포기를 택한 이유였다. 안타깝지만 내 어떠한 위로도 그녀의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을 투자하면 그만큼의 성과가 있어야 한다.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성과를 생각하면 재미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던 일도 직업이 되는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차이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어린아이는 깔깔대며 놀이를 한다. 놀이의 성과는? 없다. 즐겁기에 그냥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다르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부터 이것저것 따져보기 바쁘다. 따져보는 것 중에서 성과에 관한 것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정 시간을 투자하면 그만큼의 성과는 따라오는지 보장받고 싶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니체가 한 적이 있다. 주사위 놀이를 비유해서 말이다. 그가 말하는 주사위 놀이에는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점은 주사위 던지기를 대하는 학자와 어린아이의 차이였다. 먼저 학자들이 주사위를 던지는 이유는 아이들만큼이나 단순했다. 그만 던지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은 각 눈이 나올 확률을 알기 위해 주사위를 던졌고, 1/6라는 결론이 도출되자 더 이상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 주사위 던지기는 1/6 확률로 1~6이라는 눈만이 반복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달랐다. 아이들은 주사위를 던지기 위해 주사위를 던졌다. 늘 그랬듯 하나의 놀이였다. 던져서 나오는 1~6이라는 눈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도 좋았고, 6도 좋았다. 같은 눈금이 반복되었지만 늘 새로웠고, 던질수록 더 던지고 싶어 했다. 이것이 바로 주사위의 일곱 번째 면이라 한다. 7이라는 눈. 그 눈은 새로운 생성을 뜻한다. 미소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 아름다운 미소를 갖게 되는 것과도 같다.


목적과 성과를 중요시하는 습관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어느새 우리는 학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목적을 위해 행동하고 목적이 달성되면 행동을 그만둔다. 혹은 목적 달성이 불가능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곤 한다. 그 어떤 행동도 1~6이라는 눈에 속해있는 셈이다. 주사위를 그만 던지기 위해 던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던 이유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그녀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했다. 열심히 하던 때와 비슷한 표정과 몸짓이 보였다. 대화를 나눠 보니 실제로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했다. “한때 정말 나오기 싫었는데, 다시 즐거움이 생겼어요.” 이것이 그녀가 스파링에서 불리한 상황에 빠졌을 때 포기를 택하기보다 발버둥을 친 이유였다. 나는 그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가에 아이와 같은 미소가 번지는 걸.

이전 24화 [주짓수 에세이] 띠의 양면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