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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3. 뮤직 박스

홀로 핀 마거릿


“우리 딸이 좋아할까요? 액세서리는 처음 사주는 거라.”


막내딸 선물이라는데 거기서 ‘네?’가 뭐야 네가. 도대체 왜 버벅거린 건지. 그녀는 "그럼요. 십자가 펜던트는 실패 확률 제로예요." 하며 예쁜 박스에 목걸이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12시. 마수걸이 때 버벅거리는 바람에 오늘 하루 장사를 몽땅 말아먹었다며 애먼 손님 탓을 하고는 땡땡하게 부운 종아리를 툭툭 쳐가며 구두를 벗었다. 종일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맨땅에 발바닥이 온전히 닿는 그 느낌이란 칼바람에 귀 뼈가 쓸려나갈 것만 같은 매서운 날 뜨끈한 온탕에 몸을 담그는 느낌이랄까. 12시간 내내 전투 모드였던 신체가 비로소 비무장지대에 진입한 순간이다. 트램펄린에서 막 내린 듯이 하나, 둘, 걸음을 느리게 떼고는 겨우 제 보폭을 찾는다. 아들 방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문 밖으로 새어 나오고 온 집안에는 라면 냄새가 가득 찼다. 싱크대를 바라보며 제 할 일만 하는 큰 딸이 보인다. 구두 벗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을 텐데, 저놈의 음악 때문인가 집구석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들에게 엄마는 침대 밑에 뭉쳐있는 먼지 같다. 분명히 있다는 건 아는데 딱히 들여다보지 않는.

저것들을 키우느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지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투명인간 취급이야. 가수 그거랑 미술이랑 지들 하고 싶다는 거 쌔가 빠지도록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아르바이트해서 옷이나 사 입을 줄만 알지 공과금을 한 번 내봤어 아니면 엄마한테 머리핀 하나 사줘 봤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어디서 못 본 척이야 못 본 척은 건방지게. 나쁜 것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다녀오셨어요.”

“아들 안 잤어? 새벽 알바 가려면 피곤해. 어서 자. ”


미쳤지. 아르바이트 걱정이라니. 그때 ‘드르르르르’ 그녀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 진동소리가 정신없이 울렸다.


“어. 형우 씨.”


핸드폰을 꺼내 받자마자 큰 딸이 고개를 획 돌려 그녀를 쏘아봤다. 그러고는 먹다만 라면 냄비째 제 방으로 쿵. ‘나쁜 년. 알지도 못하면서.’


며칠 후 그녀는 가게 문을 닫고 강남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본사의 비도덕적 직영점 늘리기에 반대해온 본사 직원 박 차장과 독립 매장을 오픈하기 위해 논현동의 한 인테리어 업체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오랜만에 낯선 거리를 걸으니 눈이 호강한다. ‘이래서 강남 강남 하는 건가.’ 그녀는 생소한 분위기에 신선한 자극을 느꼈다. 튼실해 보이는 다리 하며 올록볼록 들어갈 데 나올 데 매끈한 굴곡에다 고르게 그을린듯하지만 윤기가 흐르는 게 그야말로 조각이 따로 없다.


'이런 가구는 얼마쯤 하려나.'

“오크입니다. 1920년대에 도브 테일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국 수제 테이블 장이에요. 아쉽게도 사모님 컬렉션이라 판매하지는 않습니다. 들어와서 보세요. 다른 제품들도 많습니다.”


‘이런 건 못해도 몇백만 원 하겠지. 영국? 도부 뭐? 컬렉션 같은 팔자 좋은 소리 하시네. 이깟 테이블.’ 신세한탄인지 사회비판인지 아니면 시샘 병에 걸린 건지 왜 갑자기 짜증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됐다. 이런 건 다른 세상 물건이니까 굳이 눈에 담아두지 말자며 쿨하게 그 매끈한 테이블에게서 눈을 떼어 내는 순간, 소담스러운 작은 나무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노오란 꽃망울에 희고 얇은 마가렛 두 송이가 작게 새겨 있다.


“이런 건 얼마예요?”


이것도 몇십만 원 하려나.


“아, 테이블 위에 뮤직박스 말씀이세요? 죄송하지만 손님 그 제품도 저희는 판매를 하지않습...”

"아... 파는 게 아니군요."

“직접 돌려보시겠어요?”

“네?”


누군가 직접 돌려보라 말하며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큰 키, 자연스러운 흰머리, 미색 셔츠와 갈색 면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그녀 쪽으로 다가온다. 큰 키, 흰머리, 트렌치...... 마수걸이.


“맘에 드시면 가져가세요.”


남자는 그녀에게 뮤직박스를 건네주었다. ‘가져가세요.’라는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되물어야 했지만 뮤직박스에 매료된 그녀의 손 안에는 이내 소담스러운 마가렛 두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드륵 드륵 드륵’ 그녀는 금색 빛깔의 태엽을 세 바퀴쯤 돌렸다. 어딘지 모르게 슬픈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리며 펜던트를 빤히 바라봤던 트렌치 손님은 초점 없는 눈으로 뮤직박스를 바라보다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새 주인을 만날 때도 됐지요.”


그때, 박 차장이 들어왔다. “형님.” 

박 차장과 남자는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트렌치 손님이 가게 주인이었구나. 둘은 형님 동생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남자들이 흔하게 하는 주식과 맥주 이야기도 했다. 그나저나 인사도 안 시키고 가게에 서서 이게 무슨 무례인가.


“참. 목걸이는 막내딸이 제 몸처럼 잘 걸고 다닙니다. 사장님 안목이 꼭 맞았어요.”


기억하고 있다.


"안기택입니다."

“유주영입니다.”


기택은 막내딸과 같은 펜던트를 하고 있는 주영을 보며 웃었다. 악수를 나눈 후 주영은 당황한 듯 펜던트를 옷 속으로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너무 유행하는 걸 추천했나.’

박 차장은 본사에서 나와 그간 쌓아온 업무 노하우를 가지고 새롭게 주얼리 브랜드 사업을 시작하려 했고 그 1호점이 주영의 가게였다. 둘은 기택에게서 새롭게 단장할 주얼리 매장의 가구와 인테리어 업체 몇 군데를 추천받았다. 거기서 거기인 듯한 매장 디자인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박 차장의 타깃은 감각에 민감한 고객이었다. 하나의 상품을 진열할 때도 철학을 가지고 배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기준을 높이면 견적이 예산을 범람했다. 이대로라면 매장에 진열할 제품 도매가보다 인테리어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될게 뻔했다.

고민하던 기택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음. 내일 시간 되세요? 갈 데가 있습니다.”

“네?”


또 ‘네’라니. 요즘 왜 이러니 유주영.


“예술적 감각을 빌릴 곳.”


밤 12시. 오늘은 해물라면이다. 어김없이 화장대 앞에 앉아 클렌징 티슈를 한 장 뽑아 화장을 지운다. 내일도 가게 문을 닫아야겠구나. 당분간은 일수만 꼬박 나가게 생겼다. 어쩌겠는가. 이미 결정한 것을. 한숨을 내쉬어본다. 그리고 세 바퀴. 드륵. 드륵. 드륵. 얼결에 들고 오긴 했는데 이걸 받아도 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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