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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5. 외출 후유증

홀로 핀 마거릿

기택과 주영은 학교 학생식당에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골라 자리에 앉았다. 보통 가게에 있다 보면 식사시간이 늦어져서 오후 3시쯤 먹게 되고 운이 없는 날에는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손님이 들어와 다 식은 밥과 국물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는 얘기, 커피 한잔 마실라치면 보온병에는 담아놔야 그나마 따뜻하게 마신다는 공감, 집에 돌아와 문득 밥을 제때 못 챙겨 먹었구나 싶은 걸 보면 오늘 하루도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아이러니. 먹고살려고 일하는데 살기만 하고 먹지는 못하니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이 가게 문을 연다고 말이다.


“아내가 가게 안에서 밥 먹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하루는 혼자 가게를 보는데 청국장이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뒷문밖에 가져다 놓고는 한입 먹고 닫고 한입 먹고 또 닫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맛있는지. 하하하.”

“저도요. 2층에 사는 건물 주인이 너무 싫어했어요. 뒷문이 있는 게 어찌나 고맙던지.”


실컷 웃다 보니 주영은 깜빡 잊었던 게 생각났다. 기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저기 오늘 너무 고맙습니다. 기택 씨 덕에 좋은 작품도 싸게 사고 잊지 못할 예쁜 벚꽃도 보고 학생식당 돈가스 맛도 보네요.”


기택 씨라고 했다. 주영이. 안 사장님도 아니고. 주영도 자신이 왜 기택 씨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기택은 그런 주영을 바라보고 말없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주영은 일순간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물, 물이 필요했다. 주영은 더듬더듬 빈 물컵을 들었다 내렸다. 그때 기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영도 덩달아 따라 일어났다. 기택은 손사래를 치며 물을 더 가져올 테니 주영에게 자리에 있으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타인의 자상함에 당혹스러웠던 주영이 자리에 다시 앉으며 ‘저런 친절하고 귀티 나는 남편을 둔 아내는 참 좋겠다.’ 생각하는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기택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병원’이라고 적혀있다.


밤 12시. 오늘은 짜장 라면이다. 그런데 먼지 같은 엄마를 발견한 큰 딸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뭐야. 그림이야?”

“어. 엄마 아는 사람 막내딸이 미국 교환학생 가서 서양화 공부하다가 들어왔는데 거기 뭐 행사한다고 해서 가봤거든. 가게에 고급스러운 작품 같은 게 필요했는데 너무 잘 됐지. 학생 꺼라 정말 싸.”

“미국 같은 소리.”

“야. 오지은. 너 말버릇이.”


침대 밑에서 발견한 먼지를 청소기로 깡그리 밀어버리는 큰 딸. 역시나 냄비째 들고 제 방으로 가버렸다.

나쁜 계집애. 가게 독립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데 오랜만에 엄마한테 건넨 말이 고작. 잠깐, 그러고 보니 그림 공부하는 큰 딸한테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미쳤다 유주영. 아르바이트하며 겨우 공부하고 있는 애한테 미국이라니.’


클렌징 티슈를 뽑아 볼부터 꾹꾹 눌러 화장을 지우며 딸에게 사과를 할까 새로 나온 짜장라면이냐 말을 걸까 고민하다가 딸과의 대화는 왜 늘 이런 식일까 괴로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꾹 움켜쥐는데 갑자기 영롱한 공간감이 귓 등을 스치며 울렸다.


‘띠링 링 링’


순간 주영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마가렛 두 송이가 새겨진 뮤직박스가 화장대 끝에 놓여있다.


다음 날 가게 문을 닫고 주영은 다시 논현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별 뜻 없이 그냥 받은 뮤직박스의 영롱한 소리가 영 아름답게만은 들리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가게에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구에 대해 설명하던 직원만 보였다. 사장님 안 계시냐고 물으니 오후 늦게나 돌아오실 것 같다고 직원이 말했다.


“유 사장님 오셨다고 메모 남겨드릴까요?”

“아, 아니요. 제가 연락드리죠 뭐.”


그때 가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기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조금 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했다. 급하게 보험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 했다고 기택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주얼리 유 사장님이 와계시다며 고개를 돌려 주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영은 도망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듯 뒷걸음질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직원이 쫓아 나오려고 했다. 주영은 직원에게 양손을 빠르게 흔들어가며 가게 앞 버스 정류장을 향해 종종 걸음질 치다 때마침 막 도착한 버스에 간신히 올라탔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자마자 깊은숨을 내쉬니 등에서 식은땀이 맺히다 못해 주르륵 등골을 타고 꼬리뼈까지 스미는 게 느껴진다. 가쁜 숨을 정리하며 주영은 생각했다.

‘근데, 왜 도망치듯 나온 거지?’ 때마침 도착한 버스라도 없었으면 인도를 넘어 차도까지 무단으로 횡단할 수도 있었던 자신의 무모함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머 어머 미쳤나 봐.’ 점점 숨은 가라앉고 등골을 타고 내리던 습기도 말라가는데 이상하게도 얼굴의 화끈거림은 가라앉지를 않는다. 근래 들어 어리숙하게 버벅거리는 말투도 그렇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는 게 설마 벌써 갱년기인가.

버스가 잠시 멈췄다.


“아저씨 내릴게요.”


주영은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의 정류장에 내렸다.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마침 타려고 했던 버스를 만난 것 마냥 알지도 못하는 버스에 황급히 올라탔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알리가 만무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본다. 27, 31-1, 280. 대부분 집으로 가려면 한 번은 갈아타야 했다. 주영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차들이 오는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본다. 빠르게 지나쳐가는 차들 속에서 280번의 행방을 찾고 있는 그때,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입자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니 이곳도 비행하는 입자들 천지였다.


"예쁘다."


가방 속에서 제 존재 이유를 뜬금없이 노래하는 뮤직박스의 울림이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분홍 입자들의 춤사위에 그녀는 푹 빠져 있었다.


‘띠링 링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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