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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4. 외출의 시작

홀로 핀 마거릿


박 차장은 종로의 도매상 미팅으로 기택과 주영 둘이 만나기로 했다. 주영이 기택과 함께 간 곳은 국내 유명 대학의 갤러리였다. 그곳에선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기부를 위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팬시 디자인부터 교과서에서 보던 서양 화가가 그린 듯한 그림까지 다양하다. 쌀알 줍는 부부인가 농민인가 그런 비슷한 그림도 있고. 좌절인가 뭔가 해골 같은 얼굴을 한 해괴망측한 그림도 있다. 수십 개의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이런 건 무슨 의미인 것인지, 자기만 아는 작품이 돈이 될까, 그런 생각만 들기 시작했다. 기대감을 가지고 왔던 초심이 지루함으로 다다를 때 즈음, 아무 관객도 없는 코너 쪽 그림이 주영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바탕에 형체가 불명확한 곡선과 원이 보이는 작품이었는데 노란색의 강조가 화려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세포가 분열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동글동글 물방울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금색 같기도 하고 방울들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마치 주얼리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이거요. 이거.”

“이거요? 오케이.”


마침내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하고 나니 지루함 따위는 금세 사라졌다.


“아빠.”


글래머러스한 웨이브 펌, 짙은 눈 화장, 구멍이 숭숭 뚫린 블랙진, 군화처럼 묵직한 부츠를 신은 로커 같은 아가씨가 기택에게 아빠라고 했다. 주영은 이런 자유분방한 친구에게 클래식한 아빠의 딸은 클래식한 것을 좋아할 거라며 십자가 펜던트를 추천했구나 싶어 쑥스러웠다. 순간 얼굴이 넌지시 붉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커 같은 그의 막내딸은 검은 십자가가 달린 겹겹의 가죽 팔찌를 찼고 그녀의 옷깃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목덜미 능선에는 작은 십자가 문양의 문신이 새겨있었다. 십자가에 대한 편견이 불식되는 순간이다.


“딸! 이거 누구 거니? 색감 좋다.”

“정말? 뭐예요. 아빠. 딱 봐도 클림트 카피잖아요. 현대적으로 바꾸긴 했지만 얘 표절 너무 심해. 우리 아빠 안목 어떻게 된 거야?”


‘싹수없는 기집애. 카피면 어때 좋기만 하고만. 안목 같은 소리 하네.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주영의 가게에도 주영이 본사 몰래 들여다 놓은 카피 제품이 있는데 어느 시점부터 손님들은 본사 물건 보다 카피제품을 더 찾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 그림 좋아. 색이 예쁘잖아.”

“뭐 마음에 드셨다면 사주세요. 저 저쪽 좀 가볼게요. 주말에 집에서 봐요 아빠. 안녕.”


주영과 똑같은 목걸이를 한 기택의 막내딸은 파티의 호스트 노릇을 하느라 정신없이 다른 무리에게 달려갔다.

기택과 주영은 각각 마음에 드는 그림값을 지불하고 미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림 한 점씩 들고 주차장을 향해 교정을 걷는데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입자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떨어진 한 잎. 주영은 세상 천지에 다시는 없을 아름다움을 목격했다. 4월 중순의 교정은 연분홍색 벚꽃들의 연회장이었다. 주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림을 두 팔에 꼭 끌어안고는 고개를 들어 비행하는 벚꽃들의 화려한 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꽃구경을 한지 얼마나 되었더라. 주영은 꽃을 참 좋아했다. 기택은 벚꽃이 일본 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종자가 있다는 기사도 봤고 기후가 비슷한 곳엔 오래전부터 다 벚꽃이 피지 않았겠냐며. 이렇게나 예쁜데 한껏 구경이나 하고 마음에 아름다움을 담으면 그만이라며.


“가게에 장식할 꽃들이나 보러 다녔지. 벚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것도 이렇게 학교에서.”


하늘하게 나부끼는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린 아이처럼 미소짓고있는 주영에게 기택이 말했다.


“우리 구내식당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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