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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6. 짤랑

홀로 핀 마거릿

하얗던 벽이 검은 벽으로 짙어진다. 밝은 색감의 쇼케이스는 검은 벨벳 소재로 바뀐다. 주얼리 모델 포스터가 붙어있던 코너 벽은 주영이 고른 그림으로 채워진다. 박 차장, 기택과 함께 고속 터미널과 동대문에서 발품 팔아 마련한 쇼윈도 장식 소품들은 주영의 창작으로 또 다른 작품이 되었다. 파란 색깔의 낡은 간판이 내려가고 검은 바탕에 금빛 글자가 적힌 간판이 올라간다. 새하얗던 조명을 떼어내고 부드러운 오렌지빛 간접 조명이 가게 안을 밝힌다. 보드라운 검은 벨벳 위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주얼리들. 비로소 한 달간의 준비가 끝이 났고 이제 하루 뒤, 개업식을 기다린다.

짤랑. 가게 문이 열리는 벨 소리가 들렸다.


“어머. 기택 씨.”

“이야. 그림 보는 안목이 있으시네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 하하하.”

“오픈 전야제인데 이게 빠지면 섭섭하죠?”


기택은 뒷짐 지고 있던 손에서 와인과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다행히도 돌려 따는 와인이다. 기택은 와인을 컵에 따르며 주영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 사장님.” 둘은 종이 잔을 톡 부딪히며 개업을 미리 축하했다.

오픈까지 장사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나, 모자라는 비용은 어떻게 충당해야 하나, 건물주는 어떻게 설득하나. 강풍이 몸을 향해 전력으로 불어닥치는데 그걸 뚫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디뎌야 하는 상황, 한순간 멈칫하면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엄마가 무너지면 자식의 인생에 걸림돌만 될 것이란 사실. 그게 바로 내일 개업식이 꼭 성공해야 하는 이유였다. 주영은 잘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드르르르’ 기택의 핸드폰에 또다시 ‘병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3년이에요. 코마 상태로 누워있는 게.”

“…”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미국에 유학 가있기 전에 먼저 거기 있었거든요.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결혼을 하러 가느라 운전 중이라는 거예요. 미국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를 하더니 부모에게 얘기도 없이 결혼이라니. 아내가 바닥에 주저앉더군요. 아내는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어요. 저는 딸, 아내는 아들이었죠. 아내는 여자 친구를 바꾸라고 하고는 처음엔 조용히 대화를 했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되나요. 서로 고성이 오고 가고 자기들도 차 안에서 실랑이가 있었는지 아들은 전화를 끊으려고 하고 여자 친구는 받으려고 하고. 그러다. 쿵.”

“기택 씨.”

“그 충격에 아내도 정신을 잃었고 지금까지 저러고 있네요. 이래 봬도 제가 전국에서 꽤 잘 나가던 가구 사업가였습니다. 처분할 거 다 처리하고 병원비를 대기 시작했는데.”

“그만하셔도 돼요.”

“이제 보험도 안되고, 하나 남은 가게도 적자고. 그만, 보내줄까 해요. 가고 싶은데 나 때문에 못 가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하나씩 아내와 관련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오늘 원래 병원 가는 날인데 제가 없으니 전화를 하는 거고요.”

“그럼 혹시. 그 마가렛 뮤직박스 …”


기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고. 아무 대가도 없이 겨우 두 번째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준다는 것이 이해 가지 않았는데, 새 주인을 만날 때도 됐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주영은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기택은 그렇다면 본인 대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라고 했다. 모든 물건들을 정리했고 며칠 후에 호흡기를 뗄까 한다면서.

주영이 대화를 돌렸다.


“저는 헤어졌어요. 어디서 뭐하고 살고 있는지 연락도 안 했죠. 그런데 저희가 고향이 같거든요. 소문에 나랑 이혼하고 나서 바로 다른 여자랑 산다네요. 그전부터 만났던 사이인 건 알고 있고요.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유쾌하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즐거운 아빠였는데 차마 이런 말을 애들한테 못 하겠어요. 애들은 아직도 저를 원망해요. 직장 잃고 힘들어하는 아빠를 내 쫓았다고. 대학 가기 전에는 요즘 같진 않았는데 특히 큰애는 더 심해지네요. 엄마를 먼지 취급한다고 할까?”

“부모의 이별은 자식이 어릴 때부터 그 자식이 노인이 될 때까지도 상처로 남는다고 하더군요. 뭐 어찌 되었든. 힘냅시다. 우리.”


‘톡’하고 종이컵이 다시 맞닿으니 소리 없는 종이 잔에서 ‘짤랑’하고 빛을 내는 듯했다.


‘짤랑’

“지은아.”


가게 문에 달린 벨. 문 앞에 큰 딸이 서 있다. 엄마가 평소 좋아하는 돈가스 가게의 봉투를 들고 씩씩거리며 지은은 말했다.


“내가 싫다고 했잖아.”

“지은아 그거 아니야. 어? 지은아.”


지은은 돈가스 봉투를 바닥에 던지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영이 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영의 달리기 실력으로는 지은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큰 딸의 이름을 그녀 뒤에서 크게 외쳐도 딸은 그저 앞만 보고 뛸 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뒤에서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아닌 건 맞는 걸까. 호흡기를 뗄까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내가 준 물건이라는 뮤직박스는 그냥 휴지통에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톡’하고 맞닿은 종이 잔에서 정말로 ‘짤랑’하고 빛나는 소리가 났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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