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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7. 8779

홀로 핀 마거릿

한산해야 할 금요일 아침 유흥가 골목은 주영의 개업식으로 시끌시끌하다. 가게 밖은 키 높은 분홍 리본 화환들이, 가게 안은 도토리 키 재기 하는 청록 빛깔 동양란들이 가득하다. 박 차장이 종로에서 직접 공수해온 온화한 미소의 돼지머리엔 만 원짜리와 수표들이 돌돌 말려 귓구멍 콧구멍 입구 멍에 죄다 꽂혀있다. 주영은 기독교인이다.

잔을 돌리고 술을 뿌리고 절하고 기도하고 먹고 말하고 떡 돌리고 인사하고 청소하니 두 시간 남짓한 개업식이 모두 끝났다. 지인들은 하나 둘 사랑하는 이들과 스스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형우와 형우의 아내이자 주영의 가장 친한 고향 친구 정숙은 커플 반지를 맞추겠다 한다. 말 한마디 눈빛 한줄기 허락지 않고 뒷정리만 하던 큰 딸 지은이 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주영의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아니랬잖아.”


그제야 지은이 엄마를 바라봤다.


“정숙 아줌마 남편이야. 엄마 고향 친구기도 하구. 아줌마 식당 하잖아. 아저씨는 애들 학교 때문에 서울에 있고. 엄마가 저 둘한테 돈을 좀 꿨어. 이래도 저 아저씨 싫어?”


주영은 저 둘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게 보이지 않느냐, 엄마도 어떨 땐 둘 사이가 부럽기도 하다, 이 나이에도 같이 있는 게 참 행복해 보인다는 그런 말을 했다. 지은은 형우와 정숙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와르르 쏟아낼 것처럼. 딸과의 대화에 서툰 주영은 감정의 홍수를 견디지 못할 것 같은 큰 딸의 위태로움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이럴 때마다 회피를 택했다. 감정을 달랠 방법을 모르는 큰 딸은 항상 스스로 견뎌야만 했다. 주영은 딸의 어깨에 손을 얹어 톡톡 치고는 감정의 홍수를 피해 손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이거”하며 지은이 엄마의 팔을 붙잡았다.

지은의 핸드폰에 ‘아빠’라고 적혀있었다. 전화번호 8779. 아빠라는 그 번호는 여러 개의 문자를 남긴 듯 보였다.


‘우리 딸 잘 있지? 주혁이도 공부 잘하지?’

‘생일 축하해 딸.’

‘아빠가 여수에 왔는데 여기 너무 좋다.’

문자는 매번 지은의 연속된 답장 이후로 대화가 끊겨있는 일방적인 방식이었다.

‘아빠예요? 진짜 아빠예요?’

‘어디예요?’

‘고마워요 아빠.’

‘주혁이는 노래 대회에 나갔는데 떨어졌어요.’

‘아빠 집에 오면 안 돼요?’


주영은 또다시 회피를 택하려다 이번엔 지은이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에게서 가끔 문자가 오는데 전화를 해도 신호는 가지만 절대 받지 않고 답장도 없다 했다. 속은 타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과 있으니 그 원망이 오죽했을까 주영은 그런 딸이 안쓰러웠다. 8779. 그러고 보니 참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밤 12시. 엄마와 큰 딸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개업 첫날 수입 400만 원. 이 정도라면 아이들 학비마저 보태고 대출금 갚고 직원도 한 명 더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라면?”

“이제 엄마가 보이냐?”


옅은 미소를 보이고는 뒤돌아 방으로 들어서며 주영이 말했다.


“계란 풀어라.”

“넵.”


2년 동안 이 화장대에 앉기만 하면 눈물부터 핑 돌았다. 집안 가득한 라면 냄새가 지독하게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얼마야? 어?”

“사백.”

“캡이다. 사백. 엄마. 나 아이팟. 네?”

“시급 삼천오백 원 어때?”

“전 안 먹습니다.”


뾰로통하며 투덜투덜 제 방으로 돌아가는 주혁의 뒷모습이 오랜만에 막내 아들내미답다. 짙게 번진 립스틱을 지우며 주영은 생각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라고. 근데 혹시 라면을 먹다가 지은이가 물으면 어쩌지. 저기 엄마 어제 그 아저씨 말이야.

“나오세요.” 방문 너무 주방에서 지은이 말했다.

주영은 오랜만에 큰 딸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시큼한 김치도 달고 매콤한 라면도 순하다. 엄마가 장사 밥을 먹으며 세상의 이치와 타협하는 동안 아이들은 살림의 전문가가 다 되어 있었다. ‘잔멸치는 언제 볶아놨데.’ 한 젓가락 집는데 지은이 말했다.


“근데 엄마 어제 그 아저씨 말이야.”

“컥컥.”


그럼 그렇지. 갑자기 무언가 문뜩 떠오른 주영은 물컵을 들이키며 일어나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장롱 문을 열었다. 목에 걸린 매콤 알싸한 고통을 참아가며 장롱 서랍 깊은 곳을 더듬거리다 바스락거리는 것을 찾아들고 주방으로 나왔다. 지은 앞에 놓인 건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종이쪽지. 전화번호 끝자리는 8779.


“엄마가 설명할게 지은아. 시간을 줘.”


지은은 면발을 짚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빳빳한 청바지처럼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둘은 쪽지를 한동안 응시하다 다시 아무 말 없이 마저 불은 라면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넣었다. 조금 전까지 먹이를 재촉하는 아기 새처럼 꾸르륵대던 위장은 더 이상 라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 안에 있던 거품들이 부글부글 솟아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주영은 강제로 꿀꺽 삼키며 이 순간을 넘어가려 애를 썼다. 지은이 질문하면 장롱을 열어야겠다는 실행 계획이 먹히긴 했다. 하지만 다정한 딸이 다시 뒷걸음질 칠 것이란 걸 예상하지는 못했다. 다시 원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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