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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8. 상처를 마주하다

홀로 핀 마거릿

주영은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오늘 참 행복했는데 왜 온전히 그 하루가 지나지 않는가. 이 작은 행복마저도 손에 쥘 수 없는 자신이 초라했다. 매사 긍정적으로 활기차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지만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자신 없는 못난 엄마다. 바깥에서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고운 외모와 밝은 성격 탓에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을 받으며 존재감을 나타내지만 집에만 오면 쓸데 없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찌든 것들과 엉겨 붙어 어딘가로 구르고 구르다 다시는 날아다닐 수 없을 무게만큼 퉁퉁 불어 바닥 구석 어딘가에 처박힌 먼지가 된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사느라고 그저 홀로 버텨내느라고 웃고 감추고 토닥이며 지낸 한 여인의 지난 몇 년이 이리 허무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추락한 자존감과 차가워진 가족애는 봄에 부는 따스한 살랑 바람에도 ‘쩍’하고 갈라질 듯 위태롭다. 왜 인생이 이 모양일까. 겨우 한 발 디뎠더니 한 발 더 가라 한다. 문 하나 열었더니 다시 또 문이다. 수습하고 또 수습하고 다시 수습하고. 영화에서만 보던 척척 문제를 해결하는 정예요원도 아니고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이도 없고 왜 혼자 끙끙대며 문제를 풀지 못해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탓을 했다가 미안해하고 다짐하고는 다시 무너지고 자책하는 이 무한한 루프에 갇혀 사는 걸까. ‘왜 내가 혼자 짊어져야만 하나.’ 화가 났다. 너무 초라하고 화가 나서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제 살을 짓누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도저히 그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주영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애들 아빠 바꿔.”


전화를 받은 한 여자가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술맛 떨어지게.”


여자가 전화를 끊었다. 8779다. 주영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이 울리는데 받지를 않는다. 다시 걸었다. 세 번, 다섯 번, 열두 번, 스물세 번. 그 때 여자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쌍년이 도끼로 처맞고 싶나. 어딜 자꾸 전화 질이야.”

“입에 걸레 문건 여전하네. 바꿔.”


8779는 4년 전부터 2년 동안 주영에게 협박 전화를 했다. 애들 아빠와 함께 사는 바로 그 여자다. 시작은 음성사서함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쪽 남편과 교제 중인 사람입니다. 왜 이혼을 안 해줍니까? 나도 댁처럼 안정적인 가정을 좀 가져보고 싶어요. 부탁이니 이혼해주세요.”

“저기요. 왜 전화 안 받아요? 지금 나 무시합니까?”

“야. 죽고 싶냐? 내가 한 성깔 해. 다음엔 내 전화받는 게 좋을 거야. 야밤에 도끼로 처맞고 싶지 않으면.”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저장된 메시지였다. 점잖던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걸레 빤 물 5000cc를 들이켜 질퍽거리는 오물 속에서 혀가 마비된 듯 뒤틀려있었다. 그 후로도 8779의 협박은 계속되었다. 큰 딸의 입시 실기 시험 날, 택시에서 딸의 긴장하는 모습을 달래던 주영은 8779의 전화번호가 뜨자 받지 않았다. 욕설과 협박 문자 수십 통이 저장되었고 주영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바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주영의 생일에는 점잖은 목소리로 ‘생일 축하합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끊었다. 원하는 대로 이혼을 했는데도 8779의 화풀이는 몇 번 더 있었다. 그러다 조용해진 게 2년 전이다.


“개업했다며? 남편을 무일푼으로 쫓아내 놓고 넌 가게 차려서 떵떵거리냐? 오픈 빨 좀 있겠네? 돈에 환장한 년.”


그때.


“그만해.”


남편이 들렸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감 없는 목소리는 처음이다. 항상 유쾌하게 목소리부터 큼직했던 남편은 창피해서 흐물렁하게 말꼬리를 흐릴지언정 떨리는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러려고 별거 중에 다른 사람을, 그것도 이런 여자를 만났나.


“지은이한테 아빠라고 문자가 왔던데. 제정신이야?”

“나 아니야.


남편이 여자에게서 전화를 빼았아 받았다.


“알아. 그 문자 너 아닌 거. 그게 더 미칠 지경이야. 넌 너만 생각하고 여자 찾아 떠나서 자식새끼들도 다 잊고 살면서 이까짓 예의도 못 지키니? 몇 년 동안 나한테 이 여자가 욕하고 협박하는 건 그냥 똥 밟았다 치겠는데. 애한테. 아빠 그리워하는 애한테 희망고문을. 이게 할 짓이냐. 이 미친 인간아.”

“다신 이런 일 없어.”

“나는 애들이 기억하는 당신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애들이 나를 원망해도 꾹 참고 견디는데. 당신은.”

“전화하지 마. 끊어.”

“여…여보세요. 야. 야 오정환.”


울화가 치밀어 가까스로 넘겼던 면발이 역류한다. 명치와 갈비뼈 사이에서 꿀렁대는 기포가 터져 살갗을 뚫고 흩뿌려지기 직전이다. 좁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서서 쪽지를 꺼낸 장롱을 바라보며 분노에 휩싸여 씩씩거리지만 실은 새끼발가락 끝에 있는 근육의 떨림까지 겨우 끌고 버텨 섰다. 진정하려 숨을 들이마시지만 역류하는 역겨움을 더 이상 압박하기 힘들다. 지친다. 장롱 속 가지런한 것들을 깡그리 끌어내려 찢어버리고 싶다.


“엄마.”


턱. 턱. 두 개의 짐이 주영의 등 뒤를 감쌌다. 명치와 갈비뼈 사이의 기포가 그대로 터져버려 반경 내 모든 물체와 생명들을 터뜨려 소멸시켰으면 싶다. 그냥 모조리 사라져 버려라. 지긋지긋한 것들은 전부 꺼져버려라. 등 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 따위들도 모두.


“엄마. 미안. 우리가 몰랐어.”


축축하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등 뒤까지. 아이들의 눈물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녀의 등을 적셨다. 그제야 정신이 든다. 역류하는 것들을 마른 침으로 꿀꺽 삼켜 내렸다. 그녀는 뜨거워진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선채로 소리쳐 울었다. 손안에서 울려 돌아오는 제 메아리를 들으며 숨과 울음의 경계에서 괴롭도록 쏟아냈다.


지은은 오래도록 엄마를 원망했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능력은 부족해 보여도 장난기 넘치고 늘 함께 놀아주고 제목도 모르는 팝송을 유창하게 부르며 기타를 치는 유쾌한, 가끔은 술기운에 사고를 치긴 하지만 집에 올 땐 한손 가득 맛있는 것들을 사 들고 오는 사랑 넘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던 아빠가 점점 우울해하고 엄마와 자주 다투고 한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뉴스와 역사 드라마만 보다 이따금 자식들에게 “공부는 도대체 왜 안 하냐."라며 고함을 지르는 괴팍한 노인네가 되어있었다. 떨어져 살면서도 남루한 차림으로 가끔씩 엄마에게 손을 빌리러 오는 노숙자 같은 아빠. 아빠를 이렇게 만든 것은 엄마였다. 적어도 지은에게는. 그러던 두 분이 헤어지신댔다. 서로가 지긋지긋했겠지.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엄마는 지은의 연애사와 학업 고민, 진로에 대한 결정에는 단 1%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지은은 혼자 감당해야 했다. 자신이 없었다. 사귄 지 1달 만에 제 후배와 눈이 맞아버린 남자친구 이야기도 아무리 그려도 늘지 않는 그림 실력도 학교를 그만두고 3D 그래픽을 배워 취업이나 할까 하는 깊은 고민도 모두 지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지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


아빠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고 지금은 그 여자와 살고 있으며 그 여자는 오래도록 엄마를 괴롭혀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은에게 아빠인 척 접근했다는 것을 자식들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 엄마는 친구에게 돈을 꾼 것이었고 혼자 어떻게든 가게를 꾸려보려 고군분투 중이었다. 자식들의 지원과 응원도 없이 차가운 세상 안팎에서 혼자 버텨왔구나, 나만 혼자가 아니었구나, 엄마도 준혁이도 모두 혼자였구나 지은은 생각했다.


그날 이후 가족은 서로가 있음에 애틋했고 존재함만으로 그저 감사하다며 더 단단해질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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