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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10. 엄마의 데이트

홀로 핀 마거릿

큰 키, 자연스러운 흰머리, 아이보리색 리넨 셔츠, 진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갈색 단화를 신은 기택이 저 멀리 에스컬레이터 위에 나타났다. 가끔 제 자신을 드러내려고 위트를 던지는 뮤직박스의 마가렛 꽃 송이 같다. 주영은 두 손을 뻗어 들고 ‘여기요 여기’를 외치면서 총총 뛰어 보이고 싶었지만 슬며시 오른손을 들어 가슴팍 앞에서 두어 번 흔들었다. 주영은 환하게 웃는 기택이 점점 다가오는 동안 도통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오는 모습 내내 바라만 볼 수도 없고 다른 곳을 쳐다보자니 어딜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유 없는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하’ 묘안이 떠올랐다. 주영은 팔을 뻗어 올려 크게 흔들고는 스낵코너를 가리키며 따라오라는 듯 방향 키를 틀었다. 어색한 눈동자를 들키는 일은 겨우 모면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심장이 두근거릴까. ‘요즘 왜 이러지? 가만가만 혈압이 안 좋은가? 팝콘은 혈압에 괜찮은가 몰라. 콜라는 먹지 말아야겠다.’ 이유 없는 박동을 깊은 한 번의 들숨으로 잠재우고 스낵코너의 메뉴판을 탐색했다. 하지만 무슨 팝콘 메뉴가 이렇게나 많은 건지, 그러고 보니 뭘 먹고 싶은지도 물어야 하는데, 팝콘을 싫어할 수도 있고, 다이어트 콜라를 마실 수도 있잖아, 이것도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다시 뒤를 도는데 그새 기택이 말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팝콘은 아무거나.”


때마침 그가 나타났다. 다행이다.

극장 안은 정말 고요했다. 평일에 낮에 한국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어느 정도 적당히 사람들이 있어야 애매모호한 둘의 첫 영화 관람이 덜 어색할 텐데 기택과 주영의 좌석 주변으로는 아무도 없고 열 칸쯤 뒤로 가야 네댓 명 있는 정도였다. 아직 시작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제발 앞이나 뒤, 누구라도 앉는다면 좋으련만. 통로는 왜 이리 좁은지, 원래 이렇게 극장 통로가 좁았나 과거의 챕터를 꺼내보려는데 그때에는 이런 멀티플렉스 극장도 아니었고 팝콘 대신 마른 오징어를 구워 팔았으니 이건 뭐 비교 대상이 돼질 않겠다 싶었다. 애들 없이 이런 곳에서 영화를 보는 게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혹시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가야 하면 어쩌지. 음료는 최대한 마시지 말아야 했다. 이거 앞뒤로는 다른 관객이 오기만을 바라야 하는데 옆으로는 아무도 없기를 빌고 있으니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이 솟구쳐 관자놀이의 지끈함으로 더해졌다. 온갖 솔루션을 고민하는 노력이 무색하게 극장 안에 다른 관객은 더 들어오지 않았고 예고편 하나가 끝난 후 영화가 바로 시작해 버렸다.


‘컥, 콜록콜록’

“괜찮아요? 여기요 커피.”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여탕이 나왔다. 검은 속옷 차림의 세신사 고두심은 찰싹거리는 팬티의 탄력을 자랑하며 치명적인 걸음으로 걸었고 거기에 더해 어떤 나이 든 여성의 후덕한 뒤태도 가감 없이 상영되고 있었다. 아마도 여성이 아이를 씻기는 것 같은데 아이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사나 내용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영에게는 나이 든 여자들의 볼록한 뱃살, 브라자와 빤스 틈바구니로 삐죽 나와 제 자신을 드러내는 살, 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축 늘어진 허벅지가 보일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화면 속 여인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를 리 없다는 생각, 이러니 씹던 팝콘 부스러기가 목구멍에 착 달라붙을 수밖에. 그런 주영을 보고는 기택이 키득거린다. 주영은 의도치 않게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결심하고는 가까스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꿀꺽 삼켜 민감해진 식도를 진정시켰다.


영화는 아름답게 흘렀다. 설렘 가득한 첫 만남에 같이 설레었고 기다리는 동안에 초조했고 헤어지는 순간에 안타깝다 못해 마음이 쓰였다.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어지고 여인의 짝사랑은 예뻤으며 남자의 자상함이 이상하게도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두근거리고 지끈거리던 순간은 가고 몰입과 공감, 그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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