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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12. 홀로 핀 마거릿

홀로 핀 마거릿

내 것이었구나 안도하면서도 기택의 말이 주영에겐 어딘가 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잠시나마의 외출이라고 했다. '주영 씨에게 보내는'이라고 했다. 그 말 그대로라면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렇게 영화를 함께 봐서 고마운 마음에 주는 선물이라는 뜻일 테고 그 말 그대로가 아니라면, 뭘까. 아니라면.

주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샌들을 바라만 봤다. 선물을 받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 그대로가 아니라면 뭘까. 영화는 왜 보자고 했을까. 주책맞게 문자를 보낸 나와 맥주를 마시는 것이 더 어색해서 였을까. 별것 아닌 내용이었는데 부담스러웠나. 아니면, 아니라면, 혹시 아내 때문일까. 주영은 도저히 그 샌들을 신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아주 잠깐 호감을, 아니 설렘을 느낀 것 같은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 보여서였다. 깨어있던 깨어있지 않던.


“이건 됐어요. 딸내미랑 저랑 둘이 합쳐서 신발만 산더미예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그래요 그럼. 말해봐요. 그 부탁.”

“같이 걸어 줄래요. 그때처럼.”


기택은 한동안 말없이 빤히 주영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주영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래줄 수 있죠?”


기택은 주영에게 더없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그럼요.”라고 했다.




7월의 끝.

향기로운 하얀 수국, 우아하게 뻗은 능소화 넝쿨, 야트막한 접시꽃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송화. 한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저마다 화려하게 제 빛깔을 뽐내는 수목원 꽃길 사이로 주영이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


“엄마 혼자인 게 심심하지는 않아?”


지은이 무심한 듯 물었다.


“혼자도 나쁘지 않아. 근데, 엄마도 오는 인연은 마다하진 않았어. 나이가 들수록 진심을 만나는 기회가 적을뿐이지.”


그때 주영이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어딘가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딸, 아들. 이 꽃 이름이 뭔 줄 알아?”

“이거? 몰라. 이게 뭔데?” 뒤따라 뛰어 도착한 아들이 물었다.

“마가렛.”

“마가렛? 과자 이름이잖아.”

“맞네. 과자. 근데 이름 참 예쁘지 않냐?”

“예쁘네. 근데 엄마. 이 많은 꽃들 중에 얘는 딸랑 한 송이야.”

“그러게. 홀로 핀 마가렛이네.”


이따금 존재감을 드러내던 뮤직박스는 재활용 옷 수거함을 환승역 삼아 누군가에게로 닿았을 것이다. 홀로 핀 마가렛 한 송이에 주영은 잊고 있었던 그 사람을 떠올려본다. 아주 잠깐 스쳤던 짙은 마음.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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