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범이 Dec 11. 2021

11. 한때 그리고 잠시나마

홀로 핀 마거릿

한때 주영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상한 그 사람은 주영 자신에게도 다른 이와 같은 크기만큼의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영은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충청도의 한 작은 시골 면사무소에서 말단 직원 사이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늘 유쾌함을 전염시키는 그 사람은 못하는 게 없었다. 매력적으로 대화하고 윗사람 비위도 잘 맞췄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막힐 때엔 주저 없이 묻고 해결책을 찾았다. 사람들도 늘 어쩔 줄 모르는 주영보다는 그 사람, 정환을 찾았다. 그해 가을 야유회에 정환이 통기타를 가져왔다. 중간 길이의 장발, 연한 청색의 나팔바지와 착 달라붙는 카라 티셔츠 차림에 통기타가 빠지면 섭섭한 시절이다. 주영은 즐거운 정환이 좋았고 정환은 그런 주영의 순수한 반응들이 좋아졌다.


“Country 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amma, take me home, Country roads.”


그날 이후 둘은 뜨겁게 사랑하고 찬란히 빛나 보석들을 얻었고 행복했으며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왔다. 그렇게 한동안 오래도록 아름다운 가을날을 보내다 어느 날 우연히 떨어진 낙엽 하나. 어깨에서 ‘톡’하고 털어내고 나니 일순간 나무 위에 남아있던 모든 낙엽들이 바람에 휩쓸려 머리끝부터 어깨, 외투 옷깃 안까지 쏟아져 버렸다. 털어내고 뜯어내도 털어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끈질긴 낙엽들은 시간이 갈수록 눈물로 범벅이 되어 더더욱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속옷까지 까 벗어 깨끗이 씻고 빨아야만 젖고 썩어 쿰쿰해진 낙엽들의 잔해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나씩 걷어내고 하나씩 떼어냈다. 하나씩 털어내고 하나씩 떨쳐냈다. 그마저도 견디다 보니 어느새 눈물은 점점 말랐고 젖고 썩었던 것들도 손끝에서 바스락 부서져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 다시는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랑. 너무 뜨거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로 남은 이.

기택과 주영은 얼마 없는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도 한참 후까지 만든 이들 장면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저 앉아있었다. 마냥 스크린 화면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 주영은 깊은 생각의 파도에 잠겨버렸다. ‘기택도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던 그런 사람을 떠올렸을까. 나처럼.’ 정면을 응시하던 기택이 고개를 잠깐 숙이고 있다가 말했다.


“배고파요?”

“아뇨. 팝콘을 많이 먹어서.”

“그럼, 다른 데 갑시다.”

“네? 어디요?”


기택은 코엑스 쇼핑몰의 한 신발 종합 판매점으로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주영은 졸졸 기택을 따라 들어갔다. 캐주얼한 운동화나 워커 같은 신발만 파는 곳인 줄 알았는데 여성화도 있었다. 기택은 한쪽 코너에서 베이지색의 가죽 샌들을 골랐다. 3센티미터 정도의 적당한 높이의 굽이 있는 제품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편해 보였다. 주영은 순간 얼어버렸다. 이런 신발은 젊고 높은 굽을 신는 그의 딸 것은 아닐 테고 분명 적당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인에게 어울릴 법했기 때문이다.


‘떼지 않았구나. 호흡기.’


두근대는 심장과 지끈한 관자놀이가 다시 말했다. 지금 너의 감정이 너 모르게 요동치고 있다고. 이건 갱년기나 혈압이 아니라고.


‘왜 이래. 나도 알아. 이러지 마. 촌스럽게. 만약 깨어났다면 축하할 일이지. 이 사람과 내가 무슨 사이라고. 어른스럽지 못하게 정말 왜 이래 유주영.’ 주영은 감정에 반응하는 몸의 변화를 가까스로 훈계하고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 사람과 내가 무슨 사이라고.’


“한번 신어봐요.”

“네…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만든 이들 장면을 바라보던 기택은 줄곧 정면만 응시하다 고개를 숙였다. 영화의 여운이 가슴에 남았을까, 멀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씰룩 올려 웃었다. 아마도 그때 그의 눈에 그녀의 낡은 신발이 들어왔을 것이다. 족히 칠팔 년은 된 닳을 대로 닳은 하얀 샌들.


“어서요. 신어봐요.”

“아니 이걸 왜 갑자기 …”

“...... 정말 오랜만에 잠시나마 외출할 수 있게 해 준 주영 씨에게 보내는, 내 마음입니다.”

이전 10화 10. 엄마의 데이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