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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9. 진짜 외출

홀로 핀 마거릿

지은과 주혁이 엄마의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고 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매일 밤 12시에 끓이는 라면도 세 봉지. 하루 장사를 정산하는 엄마가 미소를 보이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가 ‘사천 원’하며 왼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주혁. 하지만 엄마는 ‘삼천 원’하며 되려 내려버린다. 바쁘게 가게 일을 보다 보니 며칠 전 새벽에 장롱을 바라보며 사라져버릴까 싶었던 생각은 잊어버렸다. 화장대에 앉아 클렌징 티슈를 뽑는 순간도 이젠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띠링 링 링’


갑자기 스치는 명료한 울림. 주영은 티슈를 볼에 누른 채로 오래도록 마가렛 뮤직박스를 바라봤다. 드륵 드륵 드륵. 녹슬기 직전의 태엽을 세 바퀴 돌렸다. ‘띠링 링 링 띠링 링 링’ 긴 숨을 쉬며 부르던 뮤직박스의 노래가 제 활기를 찾았다. 이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택, 그 사람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잡생각이 뒤엉켜 꼬리를 물고 ‘그 사람과 학교 교정을 걷다가 돈가스를 먹었지. 돈가스는 우리 집 근처가 최고인데. 아니 근데 그 집 옆에 족발집도 나름 맛 집인데 장사가 왜 그리 안될까. 동네 인심이란 게 있는데, 안되겠다. 내일 저녁은 족발이다.’ 같은 결론이 난다면 잠시나마 설레던 그 모든 순간까지도 깨끗이 지우자.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큰 키, 흰머리, 코트, 그림, 구내식당, 벚꽃과 종이컵이 생각난다면. 그렇다면, 자기 전에 문자 한 통 적어보기로.


‘주얼리 유주영이에요. 아직 두 송이 마가렛 뮤직박스는 새 주인을 못 찾아서 가끔 뜬금없이 태엽이 풀려 남은 노래를 들려주곤 해요. 자다가 들릴 때 얼마나 놀라는지 모르죠? 음 … 내일 저는 쉬는데 지난번 못다 마신 와인 대신 맥주는 어때요? 우리 가게 근처에 기가 막힌 맥줏집이 있어요. 25시 편의점이라고.’


답장이 없으면 어쩌나, 거절하면 어쩌나, 갑자기 전화가 오면 바로 받아야 하나, 아니 바로 안 받을 건 또 뭔가, 아내 때문에 힘들어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가볍게 보냈나, 호흡기는 떼었을까, 보낸 문자를 다시 회수하는 기능은 왜 만들지 않은 것인지 애꿎은 핸드폰 제조업체에 대한 불만만 쏟아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강제로 잠을 자보려고 누운 순간 ‘띵동’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인어공주. 내일 오후 4시 코엑스 메가박스. 제가 전도연을 좀 좋아하거든요.’


편의점 맥주를 제안했는데 영화라니. 혹시나 하는 걱정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온갖 마인드 맵을 그렸건만 의외의 대답이 도착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호흡기를 떼었거나, 떼지 않았거나.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그럼 팝콘은 제가.’


이른 여름이 한여름 색으로 갈아입는 시기, 연했던 초록은 더 짙어지고 하늘은 어제보다 더 파랗다. 주영은 진한 청록색 리넨 원피스를 골랐다. 삼성역 코엑스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 창밖을 바라보는 내내 왠지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났다. 버스가 중간중간 멈춰 서고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코엑스몰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승객들이 늘고 오른쪽 어깨는 서있는 승객의 가방과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가방이 무겁다며 투덜거리는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해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울컹거리는 도로 사정에도, ‘워어어’하며 휘청이는 승객들의 파도 짓에 휩쓸려 발등이 밟혔어도, 꽉 들어찬 버스 안 승객들의 시큼한 땀 냄새를 옮겨 나르는 에어컨 바람에도 주영은 그저 웃음이 났다.

평일 쇼핑몰 극장 앞은 의외로 한산했다. 하지만 젊은 커플들, 아이가 있는 가족, 엄마와 딸, 친구들 무리는 있어도 적지 않은 나이의 남녀 일행은 없어 보였다. 이거 왠지 남들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다 생각하는데 그 목소리가 들렸다.


“주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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