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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2. 트렌치 코트

홀로 핀 마거릿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직, 그렇게 그녀의 수동적 가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둘은 한 여름 대낮에 냉수 들이켜듯 삽시간에 결혼했다. 그 후로 15년 동안 집안에서 살림하던 그녀가 집 밖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결혼만큼이나 찰나였다. 큰언니, 둘째 언니, 여중 여고 동창까지 총동원하여 남편의 퇴직금에 보탤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마련했다. 그녀는 손수 가게 내부를 장식했다. 남편은 손님에게 판매할 상품들을 진열하고 아이들은 어설픈 솜씨로 색지에 글씨를 적었다.


‘Open Event Sale 4월까지’


14K 전문 주얼리숍은 젊고 생기 넘쳤다. 장사는 제법 잘 되었는데 엄마가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은 오픈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그녀의 소품 인테리어 센스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가게는 전국 체인점 매출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아빠의 시간이 줄었다. 종일에서 반나절, 반나절에서 두어 시간, 두어 시간에서 마감시간. 적지도 많지도 않은 사십 대의 남자에게 좁아터진 두세 평짜리 공간은 배 나온 D 라인의 아저씨가 젊은 시절 유행하던 쫄티를 입은 것 마냥 어색했다. 세련된 가게에서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구매하러 들른 젊은 여성들은 추레한 나일론 잠바 차림의 어색한 아저씨를 보고는 발을 돌려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아내의 단골손님은 늘었고 남편의 자리는 줄었다. 아내는 가게를 자주 비우는 남편 때문에 남편은 가게밖에 모르는 아내 때문에 서로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부부의 다투는 횟수는 점점 늘어만 갔고 아이들은 생경한 부모의 잦은 다툼을 피해 PC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가게를 낸 지 1년 만에 둘은 별거를 선택했다. 남편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기 위해 고시원으로 들어갔고 아내는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5년 후, 둘은 헤어졌다.


달그락 소리가 그쳤다. 라면을 다 먹은 큰 딸이 제 방으로 들어간 듯하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어제 마시고 놔둔 소주잔을 손끝으로 성글게 닦았다. 그녀는 초록빛 이슬이 송송 맺힌 병을 기울여 한잔 가득 따라 삼키고는 오물오물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늘 그렇듯 그녀는 가게 문을 활짝 열고는 비질을 하고 유리창을 닦고 음악을 틀고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상품들을 재 정렬했다. 몇 년 전과는 달리 요즘은 하루에 손님 열 명이라도 오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본사는 매출 상위권이었던 그녀의 가게 앞 골목에 직영점을 냈다. 직원들은 젊고 예뻤고 신상품은 직영점에서 우선 판매할 수 있었다. 건물주의 세 올림 요구도 잦아졌고 건물 리모델링을 하네 마네 하며 뜨뜻미지근한 희망고문이 계속되다 가게는 권리금도 없이 보증금까지 건물주에게 상납하는 꼴이 된 지 오래다. 텅 빈 아침의 번화가 거리만큼이나 뻥 뚫린 가슴으로 가게 문 밖을 향해 한숨을 내쉬는데 급작스럽게 첫 손님이 들이닥쳤다.


“어서 오세요.”


한 남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어찌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고 있다.


“찾는 거 있으세요? 누가 사용하실 건가요? 아내분?”

"막내딸이요."


큰 키와 자연스러운 흰머리를 가진 중년의 남성 손님은 왼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는 진열장에 걸린 목걸이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는 그에게 작은 십자가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캐러멜색 트렌치코트에 얇은 체크무늬 머플러를 걸친 신사의 딸이라면 클래식한 게 어울릴 것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리며 펜던트만 바라보던 트렌치코트의 손님은 꾹 다물었던 입을 열며 돌연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좋아할까요?”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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