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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이 Dec 11. 2021

1. 엄마의 퇴근

홀로 핀 마거릿


“싫어.”


밤 12시,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니 큰 딸이 혼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다음날의 퉁퉁 부은 얼굴 따윈 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손목에서 끄집어낸 머리끈으로 대충 말아 올려 묶은 머리도 예쁘고 무릎이 가슴보다 성나 있는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예쁜 스물둘이다. 매콤 짭조름한 라면 냄새가 온 집안을 뒤덮어 여기가 가정집인지 식당인지 싶은 것을 보니 아차, 오늘도 저녁을 건너뛴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거늘. 가스불을 끄고 냄비째 식탁 의자에 앉던 딸이 밤 열두 시에 저녁도 못 먹고 집으로 들어온 엄마에게 건넨 첫마디가 바로 그랬다.


“싫어.”

“안 뺏어 먹어. 계집애야. 더럽게 치사하네.”

“그게 아니라.”


말 많고 속 깊은 큰 딸이 갓 마른 청바지처럼 빳빳해진지도 벌써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 아저씨… 싫어.”

“아니야. 그런 거.”

“암튼 싫어.”


낮에 가게로 놀러 온 고향 친구를 엄마와 웃고 떠드는 낯선 남자라고 생각했겠지.


“너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싫다 좋다야. 그런 거 아니라잖아. 웃겨 정말.”


명치 저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거품을 입 밖으로 내뿜고 말았다.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가운 입안으로 라면을 호호 불어넣는 딸의 심정이 어떨지 그녀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봤다. 거울 앞에 앉은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대화라는 건 그녀와 딸 사이에 그냥 귀찮고 불필요한 그 무엇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고 코끝이 당겨오고 턱이 떨렸다. 비강을 타고 눈가에까지 붉은 기운이 스며들자 ‘뚝’하고 한 방울이 떨어졌다.


“다녀오셨어요.”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아...” 뒷말을 이어가지도 못하고 ‘들’ 자를 들이마셨다.


남편과 이혼한 게 2년 전,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었을 때에도 5년간 별거를 했으니 그녀 혼자 아이 둘을 키우기 시작한 게 벌써 7년 전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던 남편이 선택한 인생 이모작 아이템은 분식집이었다. 둘째 아이 학교 앞이었는데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 놀거나 먹을거리가 없고 덤으로 얹어줘도 이윤이 남을 만큼 아이들은 분식집을 자주 찾는다 했다. 남편은 체력 때문에 운영이 어려워 눈물을 머금고 가게를 내놓은 60대 노부부의 뒤를 이어 우리가 맡아 운영하자고 말했다.


“좋네. 근데 방학에는?”

“방학? 너는 그냥 그런 줄 알지 뭘 또 묻고 …”


남편의 말끝이 절여놓은 배추 삼키듯 흐물렁한 것을 보니 수박 겉을 핥아도 이것보다 나으리라. 다음날 그녀는 학교 인근 부동산들을 샅샅이 뒤졌다. 여섯 번째 집이었나, 그중 그나마 선한 인상이었던 한 아주머니가 “실은 말이지.” 하며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계약하라고 하겠지만 양심상 이건 아니라며. 터무니없는 임대료도 그러했지만 방학 시즌에는 전기세가 더 나갈 것이란다. 아이들이 분식집을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했다.


“나도 안가. 김유미 있을 때면 모를까.”


노부부의 손녀딸, 얼짱 김유미. 그럼 그렇지.

아들은 학교 길 건너에 PC방과 파파이스가 있는데 초딩도 아니고 굳이 그곳을 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촌스럽다나. 본인은 자랄 만큼 자라서 애들 노는 곳 따위는 가지 않는 준 성인인데 베프 녀석이 김유미 그 애만 보면 사족을 못써서 어쩔 수 없이 가끔 들른다고 했다. 김유미는 절대 자기 타입이 아닌데 사람들은 김유미가 왜 예쁘다고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면서 냉장고에 있는 캔 콜라 꼭지를 ‘톡’ 걷어올려 따고는 어깨를 치켜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그래도 아빠가 결정하시면 엄마는 아빠의 얘기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아들의 의견을 견제하는 듯한 뉘앙스로 입을 떼었다.


“엄마 아빠 거기하면 나 진짜 학교 안 가. 쪽팔려서 어떻게 학교를 다녀.”

“알았어 알았어. 안 해 안 해. 어서 들어가 공부해.” 하며 아들을 진정시켰다.


그날 저녁, 그녀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부동산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와 아들의 심경을 차분히 설명하려 했다. ‘띠띠띠띠 띠리리. 쾅.’ 현관문을 열자마자 뒷발차기로 구두를 벗어던지며 화장실로 직행하던 남편은 한 시간 거리 회사에서부터 꾸역꾸역 참아온 것들을 뿜어내며 시원하게 소리쳤다.


“여보오. 나 관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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