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남은일들과 인수인계로 이대로는 비행기도 놓칠 것 같아 붙어버린 껌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회사를정신 바짝 차리고 힘껏 떼어내고 나온다.
짐도 어떻게 싸서 나왔는지 나중에 보니 회사 노트북에 무선 마우스 USB도 꽂아 두고 온걸 뒤늦게 발견한다.
그렇다.
우린 퇴사 당일 날 야반도주하듯 제주로 떠난다.
글로는 한 문장일 뿐인 이 일을 실제로 실행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 달 전부터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수리하지 않아 후임자 선임이 지연되었고, 인수인계 기간이 부족하다 보니 나와 남편은 사내부부로 각각 10년, 15년 다닌 회사를 며칠 만에 후다닥 정리해야 했다.
일을 병행하며 제주살이 3개월치의 짐들을 미리 싸 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여행기간인 9~12월은 여름, 가을, 겨울이 걸쳐져 있다 보니 사계절용 옷이 모두 필요해 옷장을 거의 통째로 옮기다시피 하여야 했고,
비록 숙소가 풀옵션이라지만 몸은 작아도 짐은 많은 아이들의 책, 장난감, 블럭 등의 짐들을 모두 데려가자니
아예 전체 이사를 하는 포장이사보다 훨씬 더 복잡하였다.
한 차례 짐들을 자차로 선박에 미리 실어 보내고, 택배도 수차례 미리 발송하였음에도 남은 짐들이 캐리어에 다 담기지 않아 한번 더 포기해야 할 것들은 포기하며 짐을 줄여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회사일과 짐 싸기의 터널을 지나 어쨌든 정해진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다.
제주행 야간비행기에 몸을 싣기 위해.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아이 둘을 데리고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공항 대기시간과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포함하여 때론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쉽지 않다;
특히나 최대한 미디어 노출을 줄이려는 우리 부부의 교육관 상, 비행기모드에서 틀어줄 만한 영상도 핸드폰에 없었고, 회사일에 짐 싸기에 정신이 없어 미쳐 간식도 넉넉히 준비하지 못한 우리에게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었던 하나 남은 사탕마저도 아이의 발버둥으로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아이는 역대급 말썽을 부려 주변 승객들에게 계속 죄송하다는 사과를 해야만 하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달라진 온습도를 느끼며 택시를 타 숙소로 이동하였다.
11시에 앞으로 한달간 지낼 숙소에 도착해 대충 근처 편의점 음식으로 늦은 식사 후, 숙소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피곤함에 온 가족이 바로 눈을 붙였다.
.
.
.
몇 시간 안 돼 나 혼자 눈이 떠졌다.
잠시 깨어나 무심코 창가로 눈길이 향하였을 때
야자 잎사귀의 흔들거림, 수많은 밝고 덜 밝은 별들의 뒤섞임, 창틈으로 새어오는 풀벌레 소리들, 간간히 밀고 들어오는 늦여름의 바람.
가슴을 꽈악 미여오는 벅참에 결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지금이 오기까지의 고민, 노고 등등이 보잘것 없어지는 자연의 위대함이 새삼 자각되었다.
'그래... 맞아.
자연...!!!'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간다.
창 밖 쏟아지는 별들에 이끌려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본다.
암흙같은 어둠에 조금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머리 위 빼곡한 별들이 설탕같이 내려와 금새 마음을 달콤하게 덮어준다.
지금 다이어리를 펴 이 일기를 쓰는 첫째 날에서 둘째 날로 넘어가는 새벽 5시 반.
온몸이 쑤시고, 혀 위엔 혓바늘이 거슬리게 돋아있다.
그런데이렇게 힘들어서였을까.
계속 존재해 왔는 지금 이 풍경이.
누군가에겐 당연할 이 온도, 습도, 소리, 모든 것이.
왜 이리도 감사한지.
그런 센치한 첫날밤이 지나간다.
P.S__
제목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오마주해 보았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착실한 학교 선생이던 중년의 주인공이 갑자기 하루 만에 모든 걸 뒤로하고 충동적으로 낯선 도시 리스본으로 떠나, 노년에 인생과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모습이 너무 지금 내 상황과 매치되어 큰 위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