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예요? 여기 비켜달라고 해요."
얼마 전 1호선에 막 타는데 한 아주머니가 자기 앞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홍색으로 큼지막하게 임산부 배려석이라 적힌 자리. 80대 할아버지가 이런 큰 소리를 못 들은 체 앉아있었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어디까지 가세요?" 하며 내게 손짓했고 할아버지는 종착역까지 간다며 웅얼댔다. "아이고, 노약자석이 비어있는데 노약자석에 앉으시면 좋을 텐데" 주변의 눈총이 이어졌지만 그 할아버지는 꿋꿋이 사람들의 눈총을 견뎌내고 종착역 한참 전에 내렸다.
지하철이 텅텅 비어있어도 굳이 예쁜 임산부석을 골라 앉는 사람도 있다. (예뻐서 앉는 건 아닐 게다.) 한 번은 정말 얄미워 지하철 문자 신고를 보냈다. 일반 좌석과 노약자석까지 텅텅 비어있는데 굳이 임산부 앉는 자리를 뺏어 타야겠나.
"죄송해요. 다 일찍 비켜드렸어야 했는데 늦게 봤어요." 하며 임산부 석이 아닌데도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자리를 비켜주던 여학생도 있다. 한 아저씨는 곧 내린다며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한 외국인 아저씨도 자기 앞에 난 자리를 양보했다. 한 아주마니는 서 있는 내 팔을 당겨 자리에 앉히고 다른 칸으로 헐레벌떡 피했다. 실랑이를 하다 기어코 나를 앉히는 그들에게 나는 얼마 전부터 작은 간식거리를 준비해 다닌다. 지친 하루의 끝 지하철에 앉는 잠시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데, 이걸 생판 모르는 내게 양보해 주다니 감사의 말로는 부족하게 느껴진 탓이다.
경기도권 임신부가 되고 보니,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무섭다. 지옥철은 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공략한다. 비어있는 좌석을 보면 반갑기 그지없고, 임신부가 아닌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을 보면 내적 분노가 치민다. 그렇지만 자리를 비켜달라기는 어렵다. 내가 맡아놓은 것도 아니고 임산부석 취지 자체가 '배려' 아닌가.
임신부들을 위한 혜택이 정말 많다. 많은 지자체에선 출산지원금이라며 돈도 주고, 아기 키울 때는 수당을 챙겨주며, 임신만 해도 바우처를 줘서 병원비에 쏠쏠히 보태쓸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임신부들은 배려석에 앉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배려에 기대어야 하며(자리를 비워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절반 이상의 경우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요구하면 억척스럽게마저 여겨지는 탓이다. 가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하고, 남에게도 아이가 없다며 국가적 위기가 어쩌네 하지만 설, 추석 명절이면 엄마들 커뮤니티는 고부갈등 이야기를 담은 글이 넘쳐나고, 세상에 아직도 이런 일이 있나 싶은 독특한 경험담들이 쏟아진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그들이 당당하게 받는 혜택은 돈뿐인 것이다. 사회와 가정에서도 그들이 눈치 보지 않고 새 생명을 품은 자를 위한 배려와 혜택을 충분히 누리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