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지극히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이런 나를 이해하기 힘든 첫째인 엄마, 둘째지만 장남인 아빠와 자주 싸웠다. 사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싸운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특히 엄마와 나는 치열하게 싸우고, 소리 지르고, 우는 것을 넘어서 오열을 하고, 며칠 동안 서로를 철저히 무시하고 살 정도로 사랑과 전쟁이 따로 없었다. 이를 아는 주변에서 혀를 찰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은 내 인생에 첫 번째 우선순위가 바로 부모님이라는 것이다.
갓난아기였을 때는 엄마랑 떨어지기만 하면 자지러지게 울어대서 엄마가 화장실을 못 갈 정도였다고 하고 조금 커서 엄마랑 택시를 타게 되면 혹시라도 '엄마가 먼저 내린 후 차문을 닫고 가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내리는 엄마의 치마 끝자락을 붙잡을 정도로 엄마에게 집착했다. 엄마랑 자주 부딪히던 사춘기 시절에도, 남자 친구랑 손 잡고 걸어가는 또래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고, 엄마랑 손잡고 가는 애들을 볼 때면 항상 '참나.. 누구는 엄마가 없나?' 하면서 질투하곤 했다. 툭하면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언제 오냐!"며 보채는 통에 친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처음 본 엄마의 동네 친구들이 "막내는 어딨 냐"며 "그 전화하던 딸이 이렇게 큰 애였냐"며 놀라실 정도였다. 20살이 넘고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랑 단둘이 자주 외식을 했는데 아빠 후배가 "보통 네 나이엔 친구들하고만 노는데 너는 참 특이하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이렇게 엄마, 아빠를 좋아하는데도 자주 의견 충돌이 있고, 화를 내거나 삐치거나 했으니 정말 말 그대로 사랑과 전쟁이다.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언젠간 나도 결혼을 하겠지'라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이유는 누군가와 평생 사는 게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평생 자유롭게 혼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 때문도 있지만, 외동으로서 부모님에 대한 생각 때문도 있다. 현재 나는 나 다음으로 부모님이 우선순위인데, 결혼하면 그 자리를 남편이 대체할 것이고, 자식이 생기면 그들이 또 대체할 것이고 거기에 남편의 부모님까지 있으니 당연히 엄마, 아빠는 우선순위가 멀어질 텐데 그게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진 내가,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엄마, 아빠를 두고 혼자 지구 반대편에 와서 살고 있다. 내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지나고 내가 도움을 드려야 하는 부분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질 텐데 나는 그저 나 하나 좋자고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서 혼자 좋은데도 다니고, 좋은 것도 먹고, 좋은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해졌다. 심지어 한국에서 지내다 다시 캐나다행을 결정했을 때, 사촌동생은 내게 "불효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도 내 결정에 본인들의 의견을 내비친적이 없는 부모님이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아빠가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그냥 한국에서 계속 살 줄 알았다'며 대놓고 서운해하는 통에 마음이 참 불편했었다.
문득 이번이 아닌 예전, 캐나다에 오기 전 한국에서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사교적이지도 않으며,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그때의 나는 '불행했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나 나름대로 참 많이 힘들었다. 하루하루 이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버틸 뿐이었는데 내가 만약 그런 상태로 부모님 곁에 있다면 그건 효도일까?
곁에서 효도하지 못한 다는 죄책감을 덜고 싶은 마음에 '내가 행복해야 그것이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지.', '우리 엄마, 아빠도 그것을 더 바라실 것...' 라며 나 스스로 답을 내버렸지만 사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엄마,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어떤 상황에도 그들에게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닐까? 가끔은 점점 나이 드시는 부모님의 최근 사진을 보며 혼자 질질 짜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효도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두 분 모두 꼭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 붙이자면 다 큰 자식은 부모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 때 오히려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구 반대편은 좀 많이 멀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