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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Feb 10. 2019

9. 더욱 쉽게 사랑에 빠지는 곳

지구 반대편으로

어떤 남자애와 매우 안 좋게 짧은 만남을 끝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얘한테 애초에 관심이 왜 생겼을까?', '대체 얘의 어디가 좋았던 걸까?'.

물론 내가 그 '강아지 자식'에게 관심이 가고, 호감이 생긴 객관적인 이유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짧은 시간에 푹 빠졌던 것 같아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심지어 친구들도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나 역시 머리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심지어 어차피 잘 안 될 거라는 것 마저도 느꼈지만 그 당시에 나는 나 자신을 속였다. '친구들도, 나도 아직 그를 잘 모른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것이다.'라는 잘못된 환상과 믿음으로 그런 결말을 자초했다.

빨래방에서 그 남자애와 문자로 치열하게 싸운 후, 빨래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다 된 빨래를 건조대에 널면서 생각해 봤다. 옷에 남은 물기를 탁탁 털며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한국에 있었어도 이렇게 쉽고 빠르게 이 남자애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물었다. 결론은 역시 '아니다'였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친구들로부터도 듣고, 두 눈으로도 보고, 직접 느꼈던 수많은 그 신호들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마음 가는 데로만 행동하고 좀 더 지켜보지 않고 급하게 행동했는지...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외로웠다가족들과, 친척들과, 오랜 친구들과 떨어져 아등바등 살면서 철저하게 혼자였던 나는 이곳에서 어울려 노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진지하게 같은 마음인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얼빠'라 일단 외모가 맘에 들어야만 호감이 갔는데 눈이 높은 건 아니지만 특이해서 그런지 기회는 자주 있지 않았다. 내가 좋다는 남자들은 내가 싫었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 거야.'라고 믿고 싶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다음 기회가 올지 몰랐고 다시 긴 시간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어야만 했고, 내 옆에 있어야만 했고, 나의 외로움은 사라져야만 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처음부터 내 귀를 막고, 내 눈을 가리고,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시작한 만남이 잘될 리가 만무했다. 


나는 나 스스로 불나방이 된 죄로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그 모든 아픔과 충격을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고, 이미 나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준 친구들에게 푸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쉽게 사랑에 빠진 죄에 대한 벌을 달게 받았지만 그다음에도 몇 번이나 이런 바보짓을 반복했다. 나 자신이 한심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기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외롭지가 않다. 혼자인 것이 익숙해지고, 되려 편해지고, 더 이상 스트레스받으며 노력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직도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이나 파티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만 친구 이상의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나보다 한참 어려서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 비록 나의 모든 연애, 데이트들은 실패했다 볼 수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잠깐은 설레고 행복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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