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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사회생활 배우는 중

by 고정문


대학생 때 나는 꽤나 마당발이었다. 과장을 더해서 전공무관 신입생의 절반은 줄줄 꿸 정도로 다 알았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교정을 거닐 때면, 아는 사람은 없는지 기웃거렸고, 학교만 같다 하면 페이스북 친구추가를 해댔다.


나는 그래서 내가 외향적인 줄 알았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족족 ‘너 어디 살아?’, ‘번호 좀 알려줄래?’하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싸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나도 참 좋았다.


나는 이런 나의 외향성을 장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회사생활을 할 때도 나의 이런 외향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입사했을 때엔 50여 명의 동기들, 그리고 30여 명의 지사 사람들과 하나하나 소통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심지어 지사에 잠시 들른 회사분들에게도 친한 척을 해대며 싹싹하게 굴곤 했다. 나는 회사 사람들 모두와 친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다.


‘회사는 하루의 반 이상을 할애하는 곳이잖아.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루가 즐겁지~ 회사사람들을 가족처럼! 모두모두 즐겁게 잘 지내야지~ 룰루’


철없던 어린 시절.. 결국 나의 밑천이 드러났다. 회사가 나의 한계를 건드리고야 말았다.


회사에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버린 것이다. 자기 일을 슬쩍 혹은 대놓고 떠넘기는 양아치부터, 복도통신이라며 험담을 일삼는 삐뚤어진 입들, 어린 사원들의 사적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캐내는 아재들, 같은 말도 꼬아서 욕을 섞어내는 욕쟁이, 일하지도 않으면서 컴퓨터 고쳐달라 커피 내려달라 난리인 월급루팡까지. 한 번은 다른 부서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인사팀에 밝혔다는 이유로 앞담화를 한 동료도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내 사람들에게 잘 지내고 싶었던 내 의지가 팍 꺾였다.

회사란 결국 일하는 곳일 뿐이라는 것,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간관계가 맺어질 뿐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신입사원의 환상은 와장창.


게다가 일까지 바빠지니, 누구에게 싹싹하게 굴어줄 정신이 아니더라. 사람들과 잘 지내두면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란 어릴 적 내 생각과 달리,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단호하게 구는 것이 업무에 더 효율적이었다는 불편한 진실까지 깨달아버렸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다 보니, 새로 부서배치를 받아도,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들이 누가 누군지 구분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이름과 얼굴을 외우고, 모두와 밥 한 번씩은 먹었을 나였으나, 회사사람들이 거기서 거기 같았다.


퇴사하고 병원에서 일하는 요즘은 어떨까. 환자들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라서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사람에 관심이 없으니, 이름을 잘 못 외울까,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을까 봐.


그러나 걱정은 개뿔. 이틀 만에 입원환자들 이름과 신상을 다 외웠다. 뭘 하다 다쳤는지 관심이 갔다. 얼마나 회복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과 마주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야말로 힐링이다. 내가 사람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새삼 돌이켜 깨닫는다.


왜 회사사람과 병원의 환자들이 다른 느낌인 걸까? 나는 그 차이가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너무나 가까이 지냈고,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고, 너무 많은 실망을 했다. 뭐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걸, 직장인 고정문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알바생 고정문은 일과 사람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너무 잘하려고 하지도 않고, 제 역할만하자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려울 것이 없었나 보다.


서른한 살, 백수가 되고 나서 뒤늦게 사회생활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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