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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지난 일기들을 읽어보았다.

by 고정문

일기는 나의 대나무숲, 나의 상담소다.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일기를 쓰는 편이다. 그날에 있었던 세부적인 일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기를 쓰는 그 순간에 쓰고 싶은 것들을 마구 끄적인다.


회사를 다니며 마음이 힘들 땐,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억지로 펜을 쥐었다. 나의 그 감정들을 꼭 기록해 놓아야, 미래의 내가 알아줄 것 같아서였다.


퇴사가 3개월 차에 접어드는 오늘, 문득 작년에 쓴 그 일기들을 쭉 읽어 내려갔다. 내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지냈었는지, 내 퇴사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2022.9.
6시가 지났는데. 짐을 다 쌌는데. 얼마 만의 칼퇴근인데.
퇴근하는 나를 붙잡는다.
나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 같다.
2022.10.
주말인데 종일 잠만 잤다.
기분이 울적하고 무기력하고, 걱정과 불안.
인생이 재미없다는 생각.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우울과 싸울지도.
2022.11.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 엉망이다.
모두가 자기 사정 좀 봐달라고 하는 이 조직의 미래가 밝을지 의문이다.
2022.12.
마음은 아직도 갈대다.
그럼에도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만큼 이번엔 꼭 실행해야겠다는 마음이 크다.
어떤 선택이든 모두 내게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퇴사 후 시간이 흘러 감정이 옅어지면서, 내 퇴사의 이유를 ‘회사에 대한 불만‘보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회사형 인간은 아니라고. 그러니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난 일기들을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회사 내에서 힘들었던 일들, 실망하는 일들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나는 퇴사를 결단 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도망친 것이든, 꿈을 향해 도전한 것이든, 어쨌든 퇴사를 했다. 그리고 그 퇴사의 시간들을 나는 어느 순간들보다도 사랑하고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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