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글 Sep 20. 2020

인생 2막

퇴사할 즈음 살고 있던 원룸도 건강을 더 악화시켰던 게 분명하다. 출퇴근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선택했던 2호선 역세권에 있는 원룸이었다. 침대에 누우면 주방과 욕실이 한눈에 보였다. 그 집에 산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수익형 원룸 빌딩을 지어대는 공사 소리가 났다. 도심한복판의 상자에 갇힌 느낌이 종종 들었다. (물론 그 상자에 갇히려면 1억이 필요했다.) 


종종 전에 살던 남자가 생각났다. 주인집 할아버지가 방을 보여주러 가던날 공무원인 남자가 6년째 살다가 세종시에 아파트 청약이 되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했다. 문을 열자 방 안에는 이사를 준비하느라 그랬는지 원래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면박스가 빈틈없이 쌓여있었다. 그 박스틈 사이에 놓인 화이트보드에는 궁서체로 ‘인생 2막’이라고 적혀있었다. 인생 2막이라…그의 인생2막은 집 같은 집을 산 후의 삶을 말하는것이었을까. 그도 그럴것이 쌓아둔 짐이 공간을 잠식했다고 할 만큼 여유공간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아파트 당첨전에 적은 것인지, 당첨 후에 적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그 원룸으로 이사를 마음먹었을 때 언젠가 그 남자처럼 인생 2막을 맞이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연봉도 올리고 커리어를 쌓아 아파트를 사는 꿈. 물론 그 꿈은 2년도 안되서 포기해버렸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시기에 좁은 공간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마음의 우울은 더 커졌다. 효율을 고려한 선택이었는데, 효율만 좇다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나 자신을 잘 모르고 했던 선택이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가 없었다. 퇴사를 하고 마지막 힘을 모아 이사를 준비했다.


서울에서 살았던 동네 중에 가장 삶의 만족도가 높았던 노원으로 향했다. 우연히도 이제 막 나온 집 중에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만났다. 서울 외곽에 있다 보니 중심권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공간도 넓었다. 오후 2~3시쯤 보러간 집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베란다를 통해 집 앞 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제 막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들들을 보면서 여기에서라면 몸과 마음을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계기로 대부분의 짐을 처분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다 버리고, 책도 처분하고, 낡았던 가구도 버리고 나니 이사하는 날 1톤트럭이 헐렁했다. 텅텅 빈 집에 와서 처음으로 구매한 건 마음껏 뒹굴 수 있는 퀸 사이즈 침대였다. 침대에 누워서 늘어난 여백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아침이면 눈이 부시게 햇빛이 쏟아져서 늦잠을 자려고 해도 눈이 떠졌다. 동네를 오가다 사 온 장미에서는 꽃봉오리가 쑥쑥 올라왔다. 걷고 싶을땐 많이 걷고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저녁엔 침대맡에서 책을 읽고 하루를 보내며 느꼈던 감정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지독하게 우울한 날도 있었지만, 기분이 괜찮은 날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게 조금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지금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자고 되새기다가 잠이 들곤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불만족스러웠다. 더 날씬했으면 더 예뻤으면 좋았을 텐데. 예쁘지 않으면 한가지 능력이라도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인정하기 보다는 타인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기준은 늘어나면 늘어나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항상 내가 그리는 나의 모습은 현재보다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하는데, 그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은 실패한 사람이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정받고 싶었던 정확한 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막연하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하니 마음이 항상 공허하고 채워지지 않았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져서 나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했다. 아파트 청약이 아니라 나만의 인생 2막을 준비해보기로 했다.


우선 지키지 못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항상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못하게 되면 자기 자책하는 일이 쌓여 괴로울때가 많았다. 이전에는 ‘이번 달까지 책 만들기’와 같은 결과중심의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못하게 되면 자책했다. 지금은 매일 몇 줄이라도 쓰자고 잘 안되면 내일 또 시도해보자는 식으로 실행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뭐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해야 오래갈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소비하는 습관도 리셋했다. 한창 회사를 다닐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해외여행을 간다거나 비싼 스포츠용품을 산다든지 소비를 함으로써 해소한 적이 많았다. 이사를 계기로 물건을 비우고 나니 인생에 필요한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지 않는 책, 1년 이상 입지 않은 옷, 잘 사용하지 않는 도구를 중고시장에 팔거나 나눔 했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면서 소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 지식, 칭호, 땅, 친구들, 연인을 얻는데 있는힘을 다 쏟는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그 자체로서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자아의식을 만들고 드높이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이렇게 취하기만 하는 삶은 노화의 죽음이라는 근본현실에서 우리를 차단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물건들을 우리라고 생각하게끔 되어버렸다. 진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 언제 병들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 27p, 잘 죽는다는것, 래리 로젠버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받은 선물이 있다면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힘들어지는지 알게 되었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살면서 문제는 계속 생기고 스트레스도 당연히 딸려오겠지만 이전처럼 나 자신을 방치하지는 않을것이다. 나 자신과 조금 더 잘 지낼 수 있게 된 지금이 인생 2막이다.







*

'80년대생들의 유서' 입고처

https://linktr.ee/hong_geul


이전 05화 장례비는 평균 천만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