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준비, 광고주 딸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할 일인거 맞죠...?
무슨 일 하세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듣고 쉽게 하는 이 질문에 나는 보통 “광고 기획 일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AE라고 해도 되지만 굳이 영어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Account executive’라는 어려운 영어 단어가 잘 생각나지도 않아서이기도 했다. 처음 면접 준비할 때 ‘A’는 당연히 ’Advertise’를 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래서인지 저 단어가 몇 년이 지나도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광고 전략 짜고, PT 하고, 따와서 광고 찍고 집행하고 그런 일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말들을 한다. 하지만 이건 대외용일 뿐. 회사 동기들과 모였을 때 말하는 업무들은 180도 다르다. ‘오늘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일을 겪었을까?!’하는 대회처럼 광고회사와는 상관없는 업무들이 넘쳐난다.
재완 씨, 이번 TF야.
입사 이후 가장 먼저 이상하다고 느낀 일은 연말 TF였다. 연초에 새로운 브랜드들이 런칭하거나, 연간 브랜드 광고를 많이 하므로 광고대행사의 연말은 늘 바쁘다. 처음 소집된 연말 TF는 당연히 경쟁 PT 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소환되자마자 한 일은, 교보문고에 가서 <오즈의 마법사> 동화책을 사 와서 한 장 한 장 스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스캔한 후에는 도로시의 얼굴에 광고주 얼굴을 합성했다. 그렇다, 내가 맡은 TF는 연말 광고주와의 송년회 준비 TF였다.
광고주가 광고의 신을 찾아 떠나며 한 명 한 명의 멤버들을 만나는(도로시는 광고주 상무였고, 멤버들은 광고주 팀장이었다.) 이야기는 마지막에 내가 속한 광고대행사 상무님을 만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광고대행사에서 1년 중 가장 바쁜 연말에 나는 광고주 얼굴을 한 장 한 장 동화책에 합성하고, PPT로 슬라이드 쇼를 만들고, 광고주별 맞춤 선물도 다 준비했다. 그나마 사원 때라 덜 충격 받고 시키는 대로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원 나부랭이를 시킨 거겠지만.
광고주의 보고자료를 대신 만들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 회사의 템플릿을 아예 메일로 보내고 이 틀에 맞춰서 해달라고하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폰트까지 ‘맑은 고딕’으로 맞춰달라며. 분명 자사 홍보팀이 있을 텐데, 광고 이후 안 좋은 기사가 나거나 하면 그 뒤처리를 맡기는 광고주도 있었다. 내 사수는 안 좋은 기사를 내리려 기자와 통화를 하다가 결국 쌍욕을 하고 전화기를 던져서 오히려 더 일을 크게 만든 적도 있었다.
“오늘 강타이모네 갈 사람?”
회사에서 걸어서 30분쯤 가면 있는 강타이모네 포차.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회사 사람들은 굳이 가지 않는 포차여서 각종 이상한 일들을 당하거나, 하고 나면 동기들과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그 날은 재벌 회장님의 따님의 결혼식 스냅 사진용 사진작가 리스트를 준비한 날이었다. 재벌가의 따님은 결혼식 스냅사진도 유명 사진작가가 찍어주는구나, 그걸 평범한 소시민인 내가 정리해서 전화하고 전달해야하는구나, 재벌가의 갑질에 당한 마음으로 강타이모네에 앉아 회에 소주를 한창 들이붓던 그때, 동기가 인스타 짤을 하나 보여줬다.
A 아.. 이것도 제가 하나요?
E 에.. 이것도 제가 하나요?
와 진짜 센스. 이런 사람이 광고를 해야 하는데. 이런 카피를 쓴 사람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내가 이렇게 광고대행사에서 구르고 있단 말인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난 광고형 인재가 아니야. 얼른 이 업계를 떠나야지. 퇴사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소주를 한껏 들이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네 부장님. 아, 회장님이 고르셨어요? 네네 그럼 제가 비서분께 연락처 넘길게요. “
소주 한 병을 마신 시점이지만 전혀 취하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로 완벽하게 통화. 아, 방금 나 너무 프로페셔널 했다. 그새 자괴감은 잊고 스스로에게 취했다. 그래, 자괴감 느낄 필요 뭐 있나. 이런 일 빨리하고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그냥 이렇게 술 한잔하면 또 잊힌다.
“이모, 우리 닭똥집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