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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Oct 11. 2024

바늘

부자와 낙타와 희절망

<낙타>


낙타인 나는

왜 바늘구멍에 들어가려고 하는 가

바늘로 상처를 꿰매지 못하고

상처를

더 내고 피를 뽑고 얇아져도 가능성이라곤 없는

시의 바늘

구멍에

그 작은 구멍에

들어가려 버둥대는 가


감성의 짝짓기 철에 낙오된

슬픔 한 마리가 코미디를 망치고

그 덕에 입들은 더 웃는다.


시는 이름을 부르면 사라지고

말을 하게 되면 저주가 걸려서

있지만 없고

살고도 죽는

액체이면서 고체 똥을 싸는

독일인의 고양이.


다시 이 사막에서

모래보디 많은 활자 알갱이가 살을 찢는

폭풍이 되고.


나는 굶고 목마르지만 바늘구멍을 핥으며

그곳을 통과한 뒤의 고양이를 생각한다.


물로 된 사막에서

스스로 굶주려 메말라 버리는


예민한 바늘이 된 한 글자의 시를

삼킨다.


======================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기독교의 격언으로 알려진 말이다.

  여러 의미로 해석되지만, 욕망과 욕심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뜻을 품고 있다. 낙타를 바늘구멍에 통과한다라는 말은 불가능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0.0000001%의 가능성이 있다. 낙타의 크기와 바늘의 크기는 특정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0.0000001%의 희망은 희망이기보다는 고문에 가깝다.


  가끔 많은 사람들은 '꿈'이라고 부르는, 현실에 존재하기 희박한 일을 희망하고 바란다. 그 역시 통계적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를 놓고 보면 고문이지만. 종종 그 꿈이 이뤄진 신화들이 입소문을 탄다. 발 없는 말이니 낙타보다도 빠르게 각자의 사막을 휘돌아 또 다른 신기루와 희망을 지어낸다.


  그래서 희망은 절망이고 한 몸이고... 마치 삶과 죽음처럼...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해서 위안하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때론 억지스럽다. 문학을 꿈꾸는 것이나 사람들의 선호나 지지, 혹은 로또의 당첨과 같은 것들은 우연과 필연의 차이로 구분할 수 없다. 희망과 절망을 붙여 희절망으로 부르고, 삶과 죽음을 묶어 삶죽음이라고 불러도 자연스럽겠다.


  현실과 욕망에서도 그렇다. 이제는 부자 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힘든 시대가 되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그래프가 요동칠 때마다 마음에 바늘이 하나씩 꽂힌다. 쌈지가 된 심장에 뾰족하고 좁은 희망을 숨겨두고 절망의 귀에 실을 엮어서 희망을 꺼내본다. 붉은 피 한 방울 흐르면... 그래도 살아있구나 하며 하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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