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연희의 증상은 무기력, 수면제 복용하지 않으면 수면불가. 아침에 특히 무기력 호소. 식은 땀. 저체온증. 호흡곤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수면보행증, 즉 몽유병 증세가 과해 자신을 침대에 묶고 잠든다고도 함. 수면중 요실금 호소.
이 증세로는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든데 조연희는 용케도 전문가 집단에 속해 정신공간 ‘소소앱’에 접속하고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로 현 직장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이 모든 증상을 가지고도 아직 전문직종으로 활동한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조연희, 너는 나한테만큼은 범죄자가 아닌가.
처방전을 보았다. 명상앱 접속권한 주7회 총 350분, 명상센터 주3시간 이용권, 수면제 주 7회분 처방. 트라우마 역할극앱 무제한 접속 권한. 현실감 증강 트레이닝 실습 3시간. 그러니까 ‘소소앱’이 상용화되면 조연희는 업무 이외에 잠들지 않는 시간에는 트라우마 역할 앱에 접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그녀가 밥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궁금해져서 영양상태를 클릭했다. 거식증과 폭식증을 넘나드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듯 최근 체중 그래표는 2개월 단위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조연희의 가상 역할극을 열어보았다. 환자가 자신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설치한 카메라에 잡힌 트라우마 역할극은 역할극 상담자와 가상 인물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상담자는 앱 시도 전에 인물의 나이, 성별, 목소리, 키, 몸무게, 의복 등을 설정할 수 있으며 최소한의 장소 선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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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도가 너무 짙어서 떨어질듯 말듯 찔금찔금 나오는 눈물이 있는가 하면 툭 하고 떨어지는 투명하고 맑은 눈물이 있다. 전자는 감정이 지나치게 담긴 눈물이어서 이쪽의 감정까지 지배하고 마침내 공간까지 지배한다. 마치 괴수처럼 자신의 슬픈 세계로 끌어들이는 농도가 진한 눈물.
역할극이 시작되자 나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앉았다.
어떻게 찾아냈을까 싶을 정도로 나와 닮은 존재가 가상 세계에 서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장소는 조연희와 내가 사흘 낮과 밤을 보낸 그 헛간이었다.
조연희의 눈에서 농도 짙은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아이가 된 조연희가 예의 그 목소리로 역할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니까 26년 만의 해후랄 수 있는 쉰이 되어가는 조연희의 눈물. 그녀는 떨어질락 말락 매달린 눈물을 지우려는듯 눈을 신경질적으로 비비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학교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학교에 갈 수 없어요. 아빠가 이사를 간데요. 멀리 아주 멀리 이사를 가서 그곳에는 없을 거래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저를 좀 숨겨주세요. 제발 저를 아빠에게 돌려보내지 마세요."
거짓말. 26년 전 조연희는 날 아빠라고 불렀었다.
"아빠 놀아주세요. 아빠 뽀뽀해주세요. 여기랑 또 여기도.. 오백 번 해주세요. 아빠, 아빠.”
덩치 큰 조연희가 역할극에 몰입해서 날 아빠라고 불렀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선생님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트라우마 역할극을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아빠나 선생님 역할극을 한다면 그 사람들과 같은 얼굴을 해야지 왜 내 형상을 선택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 덕분에 위산이 역류하는지 메스꺼워졌다. 폴더를 닫고 나는 화장실에 가서 안경을 벗고 얼굴을 씻고 거울을 보았다. 그때와 나는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피로가 몰려왔다. 조연희가 등 뒤에 있는 것 같아 흠칫 놀라기도 했다. 뒤돌아보니 화장실 센서가 제멋대로 작동하는 것일 뿐이어서 들어왔다가는 나가고 나갔다가는 들어오고는 했다. 화장실의 센서가 깜박이는 걸 보자 조연희의 목소리 이외에 또 하나 잊었던 냄새가 떠올라 나를 미치게 했다. 분명 그녀는 후덥지근한 헛간에서 더운 입김을 가까이 하며 “아빠, 놀아주세요. 아빠.” 하고 다가왔었다. 그때 훅 하고 끼치는 냄새. 생리혈 냄새가 그녀에게서 났다. 더러는 여자친구들이 가까이 지나갈 때 고리타분한 냄새를 맡고 그때이구나 했지만, 조연희의 것은 뇌 속에 강하게 각인될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코를 마비시켰다. 조연희의 내부에서 흐르는 따뜻한 피가 막 밖으로 쏫아지는 동안 그녀는 아이가 되어 나에게 다가와 ‘인형놀이’를 졸라댔다. 헛간에서 시작되는 인형놀이에 나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아빠가 되주었다. 나는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었고, 헛간은 외진 곳에 있어서 눈을 치우거나 낙엽을 치우는 시즌이 아니면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