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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n 07. 2020

컵을 컵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마케팅이다

"이 컵을 컵이라고 말하지 말고 다른 언어로 말해봅시다."


2010년,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나는 컵을 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컵을 손에 쥔 채 원형으로 빙 둘러싼 학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오른쪽부터 돌아갈 테니 보이는 대로 말해보라 했는데 학생들은 서로 눈치 보느라 바빴다. 그때, 평소에 가장 활발하게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물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가 손을 내리자 옆에 있던 학생이 질세라 손을 들며 외쳤다.


"손잡이가 있는 밑이 오목한 물건입니다."


교수님이 웃었다. 마치 학생들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들고 있던 컵을 연단에 내려놓고선 질문의 의도에 대해 얘기했다.


"이게 바로 시입니다. 언어는 약속이에요.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 외에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 보는 관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달라지는 것, 그걸 만드는 게 바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날의 충격은 꽤 오래가서 강의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되새겼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지금 다니는 회사 최종 면접에서도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마케팅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입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컵을 입에 대진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내 앞에 놓인 종이컵을 가만 만지작거리다 면접관이 컵을 볼 수 있게끔 살짝 들어 올렸다.


"대학에 다닐 때 이런 수업을 들었습니다. 지금 제 앞에 놓인 컵을 컵이라 말하지 않고 다른 언어로 말해보라는. 저는 이게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일, 기존에 컵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주는 일. 그게 마케터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왕이면 컵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음악으로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대표님은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봤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수업에 빚졌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시론 수업이 나를 마케터로 이끌어줬으니까.

세계적인 마케팅 구루라 불리는 세스 고딘은 그의 저서『마케팅이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마케터의 기여는 보고자 하는, 보이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벌써 5년째 마케터로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요즘은 모든 게 브랜딩이고 누구나 마케터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이란 무엇이며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인지 지나온 궤적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온전히 내가 해온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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