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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l 05. 2020

보이는 모든 게 마케팅이다

마케터의 눈

본다는 건 어떤 걸까?


'로봇' 이란 단어를 면 좁고 허름한 가게 귀퉁이에서 하루 종일 닭을 튀기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칼'이라 하면 골방에서 누군가를 매도하는 키보드 워리어의 모습이 떠올랐고.


이상 소설 특기자로 입학해 대학 4년 동안 시를 전공했던 내가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말해보았다. 나는 연결하는데 능했다. A를 보면 B라는 이미지가 연상돼 C라는 아이디어를 내는데 무리가 없었다. 덕분에 마케팅에서도 제품 또는 서비스 특성에 맞는 다른 것을 가져와 이 곳 저곳에 연결하고 스토리텔링 할 수 있었다.  


다음은 내가 대학 때 H 제약회사의 탈모치료제 마케팅을 담당하며 만든 광고 애니메이션 영상 시놉이다. 목표 타깃은 신규 고객이 될 만한 20대였으며 당시 올린 영상을 유튜브로 찾을 수 없어서 생각나는 내용만 부분 발췌했다.  


Title. 머리카락이 떠나는 길

Na. 평온했던 모발 마을에 스트레스라는 바람이 불어왔어요.  
Na. 태풍에 날아가버린 모발이들은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답니다.
Na. 울고 있던 모발이에게 길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는데
Na. 하얗고 투명한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CG. 언덕 모양 대머리가 중앙 하단에서 서서히 올라온다. 하얗고 투명한 머리가 다 올라왔을 때쯤 머리카락이 그 위에 솟아나기 시작한다)
NA. 아, 드디어 집에 왔어!
NA. 머리카락이 돌아오는 길, 마이녹실


중년 남성들에게나 관심 있을 법한 탈모치료제를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홍보해야 할까, 다소 고민했다. 10대~20대가 좋아할 만한 병맛 만화 영상으로 풀어보자는 방안을 도출했다. 그런데 어떻게 풀지? 생각하다 떠올린 게 머리카락의 의인화였다.


사실 나는 한 번도 머리숱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숱이 너무 많은 나로서는 사고가 유연하지 않았다면 결코 탈모치료제를 마케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글에도 밝혔듯 마케팅은 인식 싸움이니까 제품 또는 서비스에 대한 인사이트, 시장에 대한 이해, 적당한 디자인 구현 감각만 있으면 무엇을 마케팅하든 전혀 어렵지 않았다. 시를 배워서 그런지 낯설게 보기, 다르게 인식하기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본다는 것의 중요성은 5년간 현업에서 종사하며 더 확신하게 됐다. 다음은 내가 음원 서비스/유통 회사에서 낯설게 보기를 통해 옥외광고 아이디어를 실행한 사례다.


반드시 어떠한 아티스트를 활용해
지하철 랩핑 광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티스트 초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우리 브랜드를 알릴 수 있을까?  


한때 강남 스타일로 핫했던 싸이와, YG 유망주였던 iKON을 활용해 지하철 랩핑 광고를 하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그러나 기획사에서는 뮤지션들 초상에는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이를 맡은 담당자 입장에서는 꽤나 당혹스러운 업무임에 틀림없었고 혼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해봐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팀원 모두에게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제안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뮤지션 이름을 딴 랩핑 열차니까 모두가 아티스트에게 집중하며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했다. 나는 어차피 얼굴 봐도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 될 만한 것에 주목하기로 했다.


출퇴근길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 창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보다 보니 그 모양이 핸드폰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는 스마트폰 속 앱 서비스를 홍보하는 마케터인데? 지하철 출입문을 핸드폰 모양으로 랩핑 하면 어떨까? 가운데 로고를 박으면 우리 서비스잖아?' 약간의 포토샵 작업을 통해 아이디어를 비주얼화 해보았고 될 것 같다 싶으니 곧바로 제안했다. 결국 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서 신분당선에 아래와 같은 디자인으로 열차가 랩핑 되게 됐다. (*초기에 제안했던 이어폰은 삭제됐고 아티스트 초상은 열차 좌석 칸 위에 위치됐다)


 아이디어
실제 구현된 옥외광고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일부러 랩핑 된 열차 칸을 골라 타보기도 했고 평소 타던 지하철 칸에서 다른 칸으로 이동하며 실내 디자인을 요목조목 살펴보기도 했다. 낯선 환경에 날 내던져 놓으면 좀 더 차별화될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발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때 내가 가장 많이 서 있던 곳에 가만 멈춰서 보았다. 출입문 옆 기댈 수 있는 바가 있는 공간, 그곳에서 시선은 자연히 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계속해서 랩핑 열차를 생각하고 보다 보니 창문과 핸드폰 모양이 일순간 겹쳐 보였다. 이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랩핑 생각만 거듭 반복해서 하다 보니 눈이 트여버린 것이다. 결국엔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발로 뛰며 열심히 찾아다녔기에 다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게 아니었을까.


이처럼 마케팅은 관심을 갖고 보는 것. 대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거대하고 거창한 게 아니다. 사람은 뭐든 정말로 아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때의 바라봄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시선일 것이다.


대중은 고정관념을 깨는 발상을 좋아하고 하나의 오브제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걸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 이것만 잘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마케터다. 어쩌면 마케터란 상업적인 의미 안에서의 시인일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 교환 가치가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사실상 세상 모든 게 마케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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