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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스파거스 Sep 09. 2024

3 병동의 아프리카(1)

"아버지 저희 왔어요. 저 알아보겠어요?"


3년 새 못 본 사이에 한껏 나의 모습과 닮아가는 아들이 나의 손을 잡으며 흐느낀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 내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이 나를 바라본다. 아니. 지금 내가 가는 순간을 기다려왔던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와... 레전드"

"네? 아버지 뭐라고요?"


눈을 간신히 떠서 눈치를 보니 키득대는 손자 녀석 빼고는 아무도 못 알아들은 게 분명하다. 헛똑똑이들.


"아버지 뭐라고요? 야 너는 할아버지 말하는데 웃지 말고."

"아니다."


나도 모르게 손자 녀석처럼 웃음이 피어 나온다. 눈이 감긴다.


 



처음 요양병원에 들어선 순간은 4년 전이다. 평생 같이 나와 함께 했던 그녀를 먼저 보내고 결정한 일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돌볼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보행기 없이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며 행동반경에도 생활하는 데도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먼저 세상을 떠나야했던 것은 그녀가 아닌 나였어야 했다. 그녀는 나의 손이면서 다리, 그리고 나의 전부였다. 그걸 상실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남겨진 아이와 같았다. 점점 할 수 있는 게 없어지고 병들었다.


덕분에 혼자가 된 이후 2주에 한 번씩 나를 찾아오던 큰 아이의 표정에 피로감은 점점 쌓여갔다. 처음에는 같이 오던 며느리와 손자들도 시간이 지나 찾아오지 않고, 나와 닮은 큰 아이가 방문해서 필요한 쌀이나 물건을 배달해 주고, 잠시 이야기를 하고 갈 뿐. 


언제는 둘째와 같이 방문해서 비싼 한우팩을 남기고 갔다. 


"아버지 나이 들어도 고기 먹고 힘내셔야죠, 이제 꼭 구워서 맛있게 드세요"

"허허... 고마워 잘 먹을게"


아이들을 보내고 한우팩을 쳐다봤다. '못난 놈들' 괜히 눈물이 고인다. 그녀가 있었더라면 아이들에게 한 소리 했을 것이다. 60살쯤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체한 줄 알고 소화제만 들이키다 병원에 방문했을 때 만성췌장염 판정을 받았다. 그 이후 고기를 소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한우라니. 


사랑하지만 이제는 의무감으로 방문하는 아이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2주 뒤 큰 아이가 왔을 때 큰 애한테 이야기를 했다.


"이제 요양병원 들어가련다..."

"네? 좀 더 집에 있다가 나중에 생각하시죠"

"아니다. 너희도 고생이고 들어갈래."


한참 고민하는 큰 아이는 작은 아이와 이야기해 보겠다 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 가족들이 모두 집에 모였다. 며느리와 손자, 그리고 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오랜만에 명절처럼 깔깔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모든 재산을 정리했다. 기운남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끝내고 짐을 쌌다. 그녀의 사진과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를 챙겼다. 결혼사진. 그녀의 독사진. 핸드폰. 그리고 통장 속에 있던 그녀와 살아있을 때 좋은 거를 하자고 꼬박 10만 원씩 모아놨던 통장.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입금했던 그 온기가 느끼고 싶어 이것만큼은 정리하지 못했다. 


짐을 모두 싸고 집을 나왔다. 나를 기다리는 큰 아이의 차를 타고 정선으로 향했다. 도시의 빌딩 숲이 사라지고 푸른 한 잎을 뽐내고 있는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보다 끝을 알 수 없는 강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푸른 자연 속에 어쩌면 이질적인 빨간 벽돌 건물이 보였다.


'정선 노인 요양병원'


그날 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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