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 화면에 나온 것은 고양이 복장을 하고 있는 20대 여자였다. 그 아래로는 총싸움을 하고 있는 동영상,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여자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네모박스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확인했다. 간병사가 병동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고양이 복장 영상을 눌렀다. 아무래도 누군가 보면 오해할만한 영상이었지만, 이 빌어먹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나이 70에 발정 난 노인네로 불릴까 봐 겁이 난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댄다.
TV광고 같은 짧은 영상이 끝난 후 고양이 여자가 화면에 나왔다. 머리에 고양이 띠를 두르고 가슴은 반쯤 보이는 노골적인 의상을 입고 빨간색 루주가 돋보이는듯한 하얀색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여자가 나를, 정확하게는 화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철수오빠 안녕~"
뭐지? 내가 보이나 황급하게 화면을 내렸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지만 이렇게 사생활보호가 안될 수 있나? 뒤쳐지다 보니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탓일까? 어쩌면 내 쭈글한 이 허름한 몰골의 내 모습을 영상 사람이 봤을까 겁이 난다. 부끄럽다. 가슴이 아까보다 더 두근댔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철수 할아버지 혈압 한번 잴게요"
평소 장난도 많이 치며 안부를 많이 묻던 사이의 간호사는 코로나 이후 말을 걸지도 장난을 치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코로나 때문에 힘들지라는 위로도 하면서 아들 녀석이 태블릿과 같이 가져온 사탕이라도 챙겨주고 싶지만, 하얀 마스크는 내게도 간호사에게도 커다란 벽을 만들었다. 감히 말을 걸 수도 걸어도 안된다는 소통의 벽. 쉭쉭 거리는 소리가 끝났다.
"평소보다 좀 높으시네요. 그래도 정상 범위니깐 다음에 다시 볼게요"
"네 고마워요"
다시 덩그러니 혼자가 된 느낌이다. 옆에 있는 노인들도 천장을 보며 잠을 청하거나 하루종일 사망자가 몇 명 나왔다고 떠드는 TV를 응시할 뿐이다. 다시 태블릿의 전원버튼을 눌러봤다. 아까 그 여자가 말했다.
"방콕 갔다 와서 힐링 싹 했음! 진짜 개핵잼이었는데 완전 리프레시 하고 돌아왔어요. 망고 스티키 라이스에 빠져서 거의 밥도둑처럼 먹다 왔고, 인생샷 한 트럭 건짐ㅋㅋ 인스타에 떡밥 야무지게 풀 예정이니까 기대 ㄱㄱ! 솔직히 여행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분이랑 수다 터는 게 제일 레전드 아니냐?"
"휴방해서 심심했지? 이제 방송 풀템 장착했으니까 날 믿고 따라오면 됨ㅋㅋ 오늘도 다 같이 텐션 맥스 찍어보자고! 출첵 한 번 때리고 채팅창 폭발 가즈아~!!"
그 여자가 와다다 말을 쏟아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방콕 갔다 왔다는 말 다음으로는 무슨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남의 이야기 그리고 표정을 보며 방금까지 나를 짓눌렀던 외로움의 한 부분이 사그라들었다.
취침시간 전까지 빠져들어서 봤다. 종종 방에 들려서 필요한 게 없는지 아니면 혈압을 재는 간호조무사들을 피해 영상을 계속 감상했다. 지금까지 봤던 뉴스들은 일방적으로 나에게 정보를 주는 방식이었지만, 이것은 달랐다. 영상에 나오는 사람과 영상을 보는 나와 같은 사람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컴퓨터가 말하는듯하는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손자. 손녀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후 나의 대화는 극히 단조로웠다. 자식들은 나의 안부를 묻고 밥 챙겨 먹으라는 간단한 5분의 대화.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길어지면 한 달에 한번. 간호사나 나를 보살피는 사람들은 나의 건강 상태 체크하는 정도의 대화. 이것들이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다 보니 단순해지고 대화방법이 '나의 생각이 아닌' , '예 와 아니요' , YES OR NO'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중 접한 이 영상은 어쩌면 단순한 답만을 생산하던 자판기와 같은 나를 자극했다. 나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무슨 말은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대화의 30% 정도만 이해할 뿐, 웃으면 같이 웃으려 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이해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은밀한 일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