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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Oct 21. 2021

파도

다 큰 것들을 위한 동시




달려온다 달려온다

시커먼 파도가 나한테 온다

입을 크게 벌려 나를 삼키려 한다



내 발을 바다에 담그면

파도가 나를 먹을 것 같다



어른들은 이상하다

무서운 파도에

자꾸 발을 담그라고 한다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뭐가 무섭냐고 하신다



몇 번을 얘기해도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난 정말 파도가 무서운데

발 담그기 정말 싫은데





살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이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 횟수가 많든 적든, 내가 의도를 하든 안 하든 내가 좋으면 다른 이도 좋아할 것이라는 커다란 착각에 기인한 현상이겠죠. 저는 제가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가 저의 취향을 꼭 닮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 제가 좋아하는 색깔, 제가 좋아하는 음악, 제가 좋아하는 풍경 등등 아이도 저처럼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흐흐흐 당연히 아니겠죠?




제 착각은 아이가 세 돌이 될 무렵 조금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문장을 구사하고 어휘가 늘수록 본인의 취향이 또렷해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이를테면, 어렸을 때는 아이 옷을 사면서 순전히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골랐는데요. 어느 날부터 저의 원픽(one pick)!을 아이가 거부하더군요. 제가 일방적으로 고른 옷을 사면 아이는 절.대.로. 입지 않았어요. 아이는 화려한 디자인을 좋아하더라고요. 신발이든 옷이든 반짝거리는 것만 있으면요, 아이는 눈을 못 떼더라고요. 평소 심플한 걸 추구하는 저는 영 못마땅했지만, 아이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한철 입을 옷이니까 제가 두 손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모습에서 10대 시절 제자신이 겹쳐 보였거든요.




저는 중학생이었습니다. 때는 2월이었고 지독한 감기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제가 평소 입고 다니던 코트가 세탁소에 맡겨진 터라 엄마는 패딩을 입고 학교에 가라 하셨죠. 저는 그 올록볼록 타이어 같은 시커먼 패딩이 진짜 진짜 너무 싫었어요. 그거 입느니 그냥 교복만 입고 학교 가고 말겠다고 다짐을 했지요. 결국은 엄마 몰래 패딩 없이 학교에 갔고 그날 추워서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나요. 물론, 집에 와서 저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맞았지만요. 그다음 날도 저는 절.대.로. 패딩은 입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패딩은 안 사요.




제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싫어하는 건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저희 딸아이의 패션을 이해할 수 없지만요. 그녀는 그녀만의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냥 둡니다. 옷장을 열어보면 형형색색의 어지러운 문양이 가득해도요. 색깔 매치가 꽝이라도요. 그냥 내버려두어요. 저러다가 중학생이 되면 또 시커먼 옷만 입고 다닐지 누가 알겠어요.




각자의 취향은 여행을 하면서도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더라고요. 여행지에서는 매일 함께 하는 가족에게서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데요. 아이가 네 살 때 저희 가족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난생처음으로 기차를 타보고요. 기저귀를 떼고 첫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여행 중에서 문득문득 아이가 쑥쑥 자란 걸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광안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너무 신났어요. 꺄! 바다에 왔잖아요. 끼룩끼룩 갈매기와 밤이면 더 멋진 광안대교. 도처에 횟집이 즐비하고요. 무엇보다 바다에 왔으니 발을 막 담가보고 싶잖아요? 파도가 하얀 거품을 몰고 와서 쏴아~ 소리를 내니까 지난한 여름 더위도 잊게 만들더라고요. 아이에게는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바다였습니다. 멀리서 본 적은 있어도 가까이서 쳐다본 건 처음이었어요. 어른들은 신과 양말을 벗었습니다. 저희 딸에게도 신을 벗어서 발을 담가보자 청했지요.




앗! 그런데 아이가 무서워하더군요. 아니, 기차 타고 500km를 달려와 도착한 곳인데. 여기에 발을 담가보질 못한다니요. 괜찮다고 여기 오면 한번 담가보는 거라고 꾀어 보지만 아이는 싫어 싫어를 남발하더니 결국은 울기 직전이더군요. 아뿔싸. 좋은 여행에 금이 갈 것 같아서 더 이상 강요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껏 잘 걷던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서 모래사장을 빠져나왔지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광안리를 잊고 살다가요. 어쩌다 바다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이가 1년도 더 지난 광안리 파도를 기억하더라고요.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려니까 달려오는 파도에 입이 있어서 자기를 삼킬 것 같았대요. 그래서 너무 무서웠는데 엄마 아빠가 자꾸 발을 담그라고 해서 싫었대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멋진 파도가 아이에게는 무서운 대상이 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거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요. 송도에서 케이블카를 탔을 때 저는 바다를 건너는 케이블카가 혹시나 떨어지진 않을까 너무 무서웠는데요. 아이는 재미있게 잘 타더라고요? 그건 안 무서웠대요.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더군요. 지난 여행을 통해 저와 아이가 참 다르구나. 정말 다른 존재구나, 이런 걸 다시 한번 느껴본 시간이었습니다.




모쪼록, 서로의 취향을 알아 가는 건 비단 연인 사이에서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처음 시작하는 사이는 서로가 좋아하는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지요. 그리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서로의 것을 존중하게 됩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하면서도 아이의 취향을 알아가는 중이에요. 어떤 건 엄마랑 같기도 하고, 어떤 건 엄마와 상극이기도 해요. 안 맞을 때는 불편함을 감수해야겠지만요. 어쩌겠어요. 싫고 좋은 건 누가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이와 부모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야 더 건전한 관계가 될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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