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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Aug 19. 2020

애인의 무엇까지 괜찮으신가요?

(애인은 이제 지겨워하는) 우리의 첫 만남 이야기

오늘 애인과 통화를 하는데, 유독 목소리가 감미롭게 들렸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소개팅 첫날 그와 통화를 했을 때 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느껴졌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개팅은 평일 저녁에 이루어졌다. 친하게 지내는 회사 후배가 자신의 짝꿍의 절친을 소개해준 것이었다. 이미 소개팅을 수락한 이후에 사진을 받아보았는데, 세상에나 너무 아저씨였다. 등산 갈 때 아무거나 입은 듯한 차림새, 올드한 헤어스타일, 어플로 필터를 썼을 것이 분명한데도 어두운 피부, 게다가 쌍꺼풀 없이 기다란 눈매로 사르르 잘 웃고 흐릿흐릿 귀여운 두부상을 좋아하는 나인데 정반대의 생김새(쌍꺼풀 찐한 눈과 분명한 이목구비)를 지닌 그를 보니 외모에 대한 기대감은 자연스레 내려놓아졌다. 첫눈에 반하고 한동안 지내보다 확신이 생겨야 연애가 시작될 수 있는 나라서, 이미 첫눈에 반할 확률이 없어진 걸 알게 된 순간 소개팅 날의 설렘은 사라졌다.


다만, 소개팅 전까지 그와의 카톡 대화가 꽤 괜찮았고(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매일의 안부를 묻고, 경쾌하게 대화를 이어나갔으며, 자신의 일상을 너무 지루하지 않게 자연스레 전했다. 연인이 되었을 때 시시콜콜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놀랄 일 없게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보고를 잘해주는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이미 그는 중요한 일정은 공유를 잘하는 타입이었다. 아 그리고! 오탈자나 비문이 거의 없고 글 잘 쓰는 사람 특유의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에도 큰 점수를 주었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데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와 대화 스타일도 큰 영향을 미치므로, 일말의 기대감은 남겨두기로 했다.


혹시 비건인지, 잘 못 먹는 음식은 없는지 배려심 있게 묻던 그와 대화를 나누다, 내 단골 식당에 가도 되는지 물었더니 그도 흔쾌히 반겼다. 약속 시간은 7시. 그 식당의 위치가 애매해서 지하철역 입구에서 만나서 같이 가도 좋겠다 싶어 6시 50분쯤 전화를 했다. 목소리는 어떨까? 첫 통화였기에 궁금한 마음이 커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여보세요"


하아... 여보세요 한 마디를 듣자마자 실망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원래는 더 가늘었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후천적으로 조금 굵어진 것 같았는데 굵어진 게 저 정도이고, 목소리톤은 조금 높았다.


"식당에서 바로 만나실래요? 아님 역 근처시면 같이 걸어갈까 하고요"


"식당에서 바로 만나시죠. 저는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통화를 종료했다. 오늘은 밥만 먹고 (술이나 커피 등 2차는 가지 않고) 집에 가야겠군, 이라고 이미 결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외모도, 목소리도, 약속시간에 늦은 것도(퇴근도 5시에 했다면서 왜 조금 미리 와 있지 못한 거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도, 모두 별로였다.


급히 자리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늦어서 미안하다는 그를 보며 아주 조금 화가 풀리려는 찰나, 아무나 입지 못할 것 같은 패션감각이 돋보이는 하늘색 재킷을 벗고 흰 티만 입었는데 꽤 관리된 몸이 드러났을 때 (우습게도) 내 화는 조금 더 풀렸다. 30대 내내 연하들만 만나와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혹은 40대 남자들의 외모관리에 대한 편견이 나도 모르게 좀 있었던 모양인데, 배 나오지 않고 운동으로 관리된 듯한 40대 남자를 흔히 봤던 것은 아니었던터라 외모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는데, 얼굴도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는 실물이 훨씬 나았다. 얼굴도 작고 비율도 좋아 보기 좋은 외모였다. (써놓고 보니 그날의 나야, 정말 외모 평가 쩐다...이런 방식이 옳은 게 아니란 거 잘 알면서 첫 만남에서는 왜이렇게까지 외모지상주의자인지 모르겠다. 결국 사람은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사실 궁극의 난, 외모는 첫만남의 순간, 호감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면적인 부분을 꽤 섬세하고도 까다롭게 따진다. 그러니 내가 선택한(그동안 만나온) 남자는 실로 무척 괜찮은 남자임에 틀림없기도 하다.)


밥만 먹고 집에 가야지, 결심했던 소개팅 날. 난 결국 2차로 그와 맥주 한 잔(아니 여러 잔...)을 했다.

(이후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할게요)



아, 애인의 무엇까지 괜찮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소개팅 당일의 tmi만 방출했다. 암튼 처음 만난 날(혹은 만나기 전에), 그렇게나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외모도, 목소리도, (더위를 잘 타서) 땀 흘리는 모습도, 지금은 당연히 다 괜찮고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예쁘고 사랑스럽다. 약속시간은 대부분 잘 지키는데 항상 너무 미리 가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딱 맞춰 간다는 사실도 잘 알게 됐다. 그래도 나와의 데이트는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내 스타일!


그리고 또 괜찮은 건 바로, 애인의 방귀다. 그동안의 연애에서는 방귀를 트는 애인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애인은 처음부터 솔직하게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장이 안 좋아서 방귀가 잦은 편이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길텐데, 그 시간 동안 계속 참으면 무척 괴로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솔직함은 뭐지? 싶으면서 신선했다. 그래, 생리현상인데 뭐 어쩌겠어 싶은 마음이 들어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다만, 최소한의 예의로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한 가스 발사는 삼가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애인은 가스 신호가 올 때마다, 저 멀리로 가서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가스를 발사하고 온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여전히 까르르 웃는다. 천생연분인지, 난 아직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똥방귀 개그를 그렇게나 좋아한다.


방귀대장이어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서 더 재밌어!

지금의 난, 애인의 그 무엇도 다 괜찮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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