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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Nov 20. 2020

일상의 풍경들 #11월 셋째 주

#신사역


오랜만에 신사역에 갔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성형외과 광고들. 이 동네는 여전하구나. 외국사람들에게 심어진 한국의 이미지도 이런 것일까. 과한 성형, 외제차, 명품백으로 나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다면 초라해질 것만 같은 곳. 속이 좀 울렁거렸다. 자연스럽지 않은 걸 보면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 같은 것이었다. 한 때 가로수길의 뭔가 고급스러운 왁자지껄함을 즐기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뭘 몰랐나, 너무 어렸나. 코로나로 숨죽인 공간에 성형광고 벽지만 덧발라진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나 그로테스크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의 공간들은 이렇게 공허하게 두지 말아야지.


#보약

애인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한 클래스는 이번 주가 마지막 수업이었는데, 감사의 의미로 과자와 음료 등을 준비한 학생들 몇몇이 있었다고 한다. 고 3이라 다들 수능 준비에 정신이 없는데, 저렇게 감사인사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는 자체가 당사자가 아닌 내가 봐도 감동이었다. 과자를 꺼내보니 빼빼로 상자마다 "ㅇㅇㅇ 선생님 감사합니다! ㅁㅁ드림"이라고 적혀 있다. 한겨울의 귤처럼, 작지만 사랑스럽고 예쁜 마음. 요즘 애인이 바쁜 일정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서 "보약 좀 챙겨 먹어야 하나?"라고 얘기를 건넸었는데, 결국 이런 마음이 보약이 아닐까. 나도 손을 얹어 애인이 선물 받은 빼빼로를 함께 먹으며 생각한다. 이런 예쁜 마음이 담긴 과자를 먹었으니  마음에도 보약이 될까. 조직검사를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고민

우리 모두 크고 작은 고민들을 안고 살아간다. 코로나 시대이기에 같은 고민도 더 가중되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고민은 크기와 상관없이 늘 무겁고 버겁다. 하루는 A친구와, 또 하루는 B친구와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솔직히 나눴다. 내 속내를 잘 아는 친구들이기에 위로를 받고 싶고, 나도 친구의 마음을 쓰다듬고 싶었다. A친구는 언제나 씩씩하게 뭐든 잘 해내는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로 내게 힘을 실어줬다. 그리고 덧붙여 얘기했다. "하나야, 이럴 땐 애인한테도 많이 기대. 무언가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네 복이야" 그랬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도 넘치는 사람들. 엄마, 친구, 애인, 그리고 업무상 필요했던 일도 도와주게 된 동료까지. 늘 곁에 있어 고마움의 크기를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 무디게 스쳐 지나갔다가도, 이렇게 타인이 짚어줄 때 더 확실해지는 사실들이 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속앓이를 하고 있던 B친구. 내가 전했던 얘기들 속에서도 그 친구가 듣고 싶었던 얘기들이 있었을까. 잠시라도 마음이 편했기를.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존재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11월

울긋불긋했던 낙엽이 지고,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계절이 왔다. 가을이 점차 익어가고 있었고 요 며칠, 여름같이 느껴지는 비가 세차게 내리자 은행잎이 모두 떨어졌다. 덕분에 거리가 온통 노란색이었다.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도 포근함이 느껴졌다. 가까이 있지만 열심히 돌아보지는 않던 경복궁도 거닐고, 은행나무를 품은 정원이 인상적인 카페에도 몇 시간 동안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꽉 찼다. 함께했던 애인은 그동안 매해 11월은 너무도 바빴기에, 11월이 이렇게나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었다고 했다. 우리는 11월에 가을을 찾아 여기저기 참으로 부지런히 다녔다. 제주로, 연남동으로, 경복궁으로, 필운동으로. 아름답고도 다양한 풍경을 포착해두었다. 우리는 그 날의 풍경들을 오롯이 다 가졌다. 곱씹을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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